소설/레나르트아파트에어서오세요

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26)

토끼몹 2010. 9. 12. 14:51

타르타로스 공식 카페(http://cafe.naver.com/tata0)에 올렸던 소설 모음입니다.
그 당시 썼던 글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 개강 전에 끝낸다면서 질질 끌고 있는 딥입니다// 으앜.

* 피드백 항상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읽어주시는 분 모두들 행운 버프 얻어가시라 - !

 

------------------------------------------------------------------------------------------------

 

"디데이가 오늘이었어?!?!"

 

스크린에 나온 프레젠테이션에는 분명히 토요일 오늘이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레나르트 아파트에서는 이미...

"슈발만씨, 엘핀도스씨께 연락해주세요. 루코씨는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주시구요."

아엘로트의 지시에 다른 두 사람이 군말없이 그대로 따른다. 루코가 연구실에 있는 모든 컴퓨터의 전원을 키고 다니는 동안 아엘로트는 프로젝터와 연결된 노트북의 폴더를 뒤졌다. 이럴 때는 파일들에 비밀번호 하나 걸려있지 않은 걸 국가적 손실이라면서 한탄하기보다 고맙다 바보들아 하면서 감사해야겠지?

 

그 즈음, 레나르트 아파트에서는.

 

"히야아...이거 야단났군."

펠리언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자 이실리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치유' 속성의 이실리아가 다시 그녀의 능력을 되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엘핀도스는 직접 그녀 앞에서 치유술을 보여주기로 했다. 퀸시가 그날 엘핀도스로부터 치유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던 이유였다. 퀸시는 크로모도의 아버지가 아파트 단지 주변에 설치했던 독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하지만 펠리언의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엘핀도스의 설명과 시범에도 불구하고 이실리아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죠, 펠리언씨. 치유 마법이 쉬운 건 아니잖아요."

이실리아를 위해 루엔트가 한 마디 해 봤지만, 펠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맞긴 하다만, 이실리아씨는 오볼루스 단원들 중에서도 치유술로 꽤나 이름을 날리셨던 분이라고. 그래서 금방 다시 기억해내실 줄 알았단 말이지."

"어쩔 수 없지요."

정작 이실리아를 위해 노력을 했던 엘핀도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분명 다시 능력을 되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믿음의 힘이 중요한 법이니까요."

"우리 대장은 마음씨가 너무 좋아서 탈이야."

펠리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럼 난 가도 되는 거야?"

치유술을 받은 후 가만히 앉아있던 퀸시가 입을 열었다.

"아, 하긴 정령 아가씨는 집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군."

펠리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퀸시는 폴짝 일어났다.

"그럼 난 갈게. 정말 고마워." 그리고 퀸시는 허리굽혀 인사한 후 몸을 돌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행운을 빌어."

 

엘핀도스네와 그녀의 기사단이 모여있던 막사 - 오볼루스 기사단에서 아파트 단지의 중앙 쪽에 막사를 여러 개 설치해놓은 탓에 정말 전쟁이라도 한바탕 벌일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 에서 막 나오는 퀸시의 심정은 사실 착잡했다. 5년 동안 이렇게 몸이 가뿐한 적은 없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할 상황이었지만, 퀸시는 크로모도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만 드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크로모도가 그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연구에 몰두했던 이유는 자신의 병 때문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독을 제거한다'느니 그런 식으로 둘러대곤 했지만, 크로모도가 팠던 책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크로모도의 연구 주제는 독을 제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체에서의 해독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타르타로스 사건이 터지고 5년 후에도 크로모도는 퀸시를 위한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어느 정도 병의 진전을 늦출 수는 있었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기에.

그런데 이렇게 쉽게, 엘핀도스라는 사람의 치유 마법으로 자신의 병이 거의 다 나은 꼴이 되어 버렸다. 엘핀도스가 치유술의 대가라는 말은 들었지만...너무나 쉽게 문제가 해결된 탓에 퀸시는 도리어 크로모도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그렇게나 자신을 위해 연구를 했는데.

 

"...오늘은 별이 많이 떴네..."

그렇다고 자신이 위축되어 있으면 크로모도의 기분이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진 않을 것이다. 친구를 위해 퀸시는 가슴을 펴고 저녁 하늘을 올려다 봤다. 보통 아파트 옥상에서 지냈던 퀸시였지만 이렇게나 별이 하늘에 많이 박힌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별똥별?"

게다가 몇몇 별들은 움직인다. 어라라?

 

'꿈꿔온 만남이 두려워 쓰러진다 해도 ~ '

'찰칵'

"네, 엘핀도스입니다. 슈발만씨? ...네?!"

이실리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엘핀도스의 화들짝 놀라는 소리에 시선들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아...예...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수고해주세요."

"무슨 일이야, 대장? 슈발만씨는 여관에 갔지 않았나? 왜 갑자기 연락을..."

엘핀도스는 전화를 끊은 뒤 한 손을 들어 펠리언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 막사 가운데 놓여있는 테이블을 손으로 쾅 내리쳐 막사 안을 조용히 만들었다. 안 그래도 다들 입다물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여러분.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정부 쪽에서 오늘 진군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펠리언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망설임없이 엘핀도스는 다시 테이블을 내려쳤다.

"조용히 해 주십시오!"

"......."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내일 예정이 하루 앞당겨진 것 뿐입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전하는 엘핀도스는 여유를 잃지 않은 차분한 상태였다. 그런 사령관의 태도는 기사단 일원들의 기상을 다시 바로잡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어느새 엘핀도스 앞에 대열을 맞추어 금방 전투에 뛰어들 수 있을 기세로 서 있었을 정도이니.

"루엔트, 다른 막사에 이 소식을 전해주세요. 펠리언은 - "

하지만 루엔트가 굳이 나갈 필요가 없었다. 엘핀도스의 지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막사에서 온 듯한 사람이 막사 안으로 뛰쳐들어왔던 것이다.

"엘핀도스님, 큰일났습니다! 정부군의 공격이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엘핀도스가 좀 더 힘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시작이다. "작전 A입니다. 전군, 전투 대형으로!"

그러자 미리 짜 두었던 작전에 따라 기사들이 대열을 맞추어 신속히 막사 밖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금방 비어버린 막사 안을 휘휘 둘러보던 펠리언이 한 마디 했다.

"...음? 크로모도씨가 안 보이네?"

 

"퀸시!!!"

빠르게 이동하는 기사단 사람들의 속을 뚫고 크로모도는 단신으로 퀸시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차피 엘핀도스가 있던 막사는 아파트 단지 정중앙에 있었으니 퀸시가 2동으로 다시 찾아가기 힘들리 없었고, 게다가 엘핀도스의 지시로 자신은 미리 아파트 단지 주위에 마법진들을 새로 설치해놓아 걱정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퀸시에게 해를 입힐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경쓰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젠장, 알퐁스!"

언제 상대편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마음이 급해진 크로모도는 재빨리 알퐁스를 소환해냈다.

"왈!"

"퀸시를 찾아!"

"왈!"

알퐁스가 거구의 몸집과는 안 맞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간만에 운동 좀 하겠군. 크로모도도 알퐁스를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5년 전의 처참함은 자신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발, 퀸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한편, 루코는 엄청난 속도로 국가 정보원 연구실의 컴퓨터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평소에 인터넷 검색질을 하며 키웠던 타자 속도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이런게 있는데, 뭐지 이건?"

책상 서랍들을 죄다 열어보고 다니던 슈발만이 무언가를 루코에게 건넸다.

"아, 이거 USB잖아! ...잠깐, 슈발만씨 USB 몰라?"

"그..그 이야긴 나중에 하자."

평소 같았으면 핑코와 함께 슈발만을 놀렸을 터였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루코는 USB를 컴퓨터에 푹 꽂고 얼른 저장되어 있던 파일들을 둘러보았다. 파일명들이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작성 날짜 이야기인가, 하며 루코는 아무 파일이나 하나 골라 열어보았다.

 

아. 잭팟.

 

"우와, 이거 설마!"

루코의 감탄사에 저 멀리서 이것저것 잡다하게 뒤지던 아엘로트가 달려왔다.

"이건...공격 루트 시뮬레이션이군요."

"아엘로트씨, 그럼 이거-?!"

"슈발만씨, 연락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슈발만은 혹시 몰라 저장해뒀던 단축키를 눌러 엘핀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엘핀도스씨, 저희 공격 루트를 찾은 것 같습니다,"

모니터에 뜬 루트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는 슈발만을 보며 루코는 희열을 느꼈다. 내가 이런 것을 해 낼 줄이야!

 

그런데.

 

"..이런..."

아엘로트가 심상치 않은 말을 흘렸다. 수상해서 아엘로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세상에, 문 밖의 복도 저멀리서부터 형광등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접근하고 있다는 뜻. 아엘로트는 전화를 한창 하던 슈발만의 옷깃을 잡아 아래로 휙 끌어당겼다. 덕분에 슈발만이 바닥에 넘어지면서 휴대 전화를 손에서 놓쳤다.

"뭐하는 거야 아엘ㄹ - 웁!!!"

게다가 항변하려다가 입까지 손으로 틀어막혔다.

"우리 들켰다구! 어떡해?!"

상황을 파악한 루코가 재빨리 말하자 바닥에 넘어진 채 당황해하는 슈발만. 그 와중에도 복도의 형광등은 차례로 하나씩 켜져오고 있었다.

"..슈발만씨, 우리 뒷쪽에 비상문이 있죠."

"웁웁?!"

"루코씨 데리고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아엘로트는 그러면서 슈발만을 놓아주고는 자신은 비상문과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이봐, 당신은 어디가 - "

루코가 깜짝놀라 소리질렀지만, "으악? 슈발만씨?!"

벌떡 일어난 슈발만이 루코의 팔을 덥석 잡길래 루코는 직감적으로 '이제 도주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USB부터 얼른 뽑았다.

 

아엘로트가 루코와 슈발만이 반대쪽 비상구로 안전하게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연구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불이 켜졌다. 여러 사람들이 곧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옷 입은 것을 보니 경비업체 직원도 있었고 이곳 연구원도 있는 모양이었다. 다들 어디있다가 이제서야 온 것일까, 아엘로트는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네. 이잔."

 

 

 

"헥..헥....자, 잠깐만, 슈발만씨,"

자신들이 숨어들었던 연구실이 하필이면 10층에 있었기에 루코와 슈발만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쯤엔 둘 다 탈진 상태였다.

"여기서..헉...멈추면..안 돼...저기까지..."

"알았어....으으...."

슈발만이 가리킨 곳은 수풀이 무성하게 진 화단이었다. 명색이 국가 정부 기관일텐데 건물 뒷쪽이라서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이라 그런지 화단에는 꽃이 있는 게 아니라 잡초와 이름모를 키 작은 나무들만 무성했다.

슈발만의 말대로 그 수풀 속으로 들어간 후에야 루코는 호흡을 진정시키고 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아엘로트씨는 어딨어?"

"어?"

"설마 냅두고 온 거야?"

"아, 그게,"

슈발만이 부정을 하지 않자 루코는 슈발만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며 화를 냈다. "아니 그러면 어떡해? 이건 완전히 동지를 저버리는 일이잖아! 아무리 그 사람이 게이같다지만 그런 데 버려두고 와도 되는 거야?!?!?!"

"뭐?! 그런 소리 안 했어!!!"

당황해서 슈발만이 루코를 급히 떼어놓았지만 루코의 얼굴은 걱정 반 격정 반이 섞인 얼굴이다.

"설명해줄테니까. 그 전에 아까 그 유..뭐시기부터 줘 봐."

그러면서 슈발만은 갖고온 가방에서 무언가 꺼낸다.

"..어? 그거 넷북 아니야?!"

루코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USB도 모르는 슈발만이 넷북은 어떻게 알고 갖고 있는 거지?

"아엘로트 거야."

"응?"

슈발만은 넷북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저번에 우리 셋이서 모였을 때 말인데......."

 

4일 전, 그들이 국가 정보원에 몰래 들어가자면서 따로 모였을 때. 루코가 집으로 돌아간 뒤, 아엘로트는 슈발만을 따로 불렀다. 그러더니 자신이 사실 국가 정보원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후 아엘로트는 자신이 들어갈 연구실이 몇 층에 있는지, 그리고 그 연구실에는 비상문이 있는데 그게 어디로 통하고 어디로 나가면 입구를 거치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위급할 때는 어디에 숨으면 된다든지 등등을 가르쳐주었다.

"넷북도 그 때 받은 거야. 여기서는 무선랜이 잡히니까 인터넷으로 웹하드 접속해서 파일 받으라고..."

"이런데서 일했었다는 거야? 세상에......."

루코는 멍한 얼굴로 높디 높은 정보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엘로트가 타르타로스 사건에 가담했었다는 것을 알려주면 루코는 제정신을 못 차리겠지. 그 말은 놔 두자.

 

슈발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아엘로트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도 잠시 온몸이 굳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과거를 따지기보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현재를 따지기로 했다. 아엘로트가 진짜 이름이든 아니든 어디서 일했든, 어쨌든 그 녀석이 자신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게다가 자신의 직감이 아엘로트를 믿으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 된 거겠지. 이래뵈도 자신의 직감은 적중률이 높으니까.

 

"아, 근데 루코...이거 인터넷 어떻게 켜는 거야?"

"...이봐."

 

 

"설마 선배님께서 직접 오실까 했는데...정말 오셨군요."

이잔 후배님의 감정 하나 없는 말을 들으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실감이 났다. 뭐, 이잔은 항상 그런 말투기는 했지만. 아엘로트는 앞의 책상에 놓여있는 시계를 힐끔 보았다.

"그런 말은, 내가 올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가?"

"역시 추리력이 좋으시군요."

"고마워," 여유를 잃지 않기 위해 일부러 웃으며 답하는 아엘로트.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기본적으로 모든 직원의 통화 내용을 도청할 수 있기 때문인데...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아."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디오네가 만났던 일 정도야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디오네는 아엘로트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지 몰랐으니 휴대 전화로 약속을 잡는 걸 신경쓰지 않았던 걸테고. 하지만 윗사람들은 아리엘이 디오네를 갑자기 만나려는 것이 꽤나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디오네가 미행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엘로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네...내가 그것때문에 여길 나갔지."

"선배님께서는 항상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셨죠."

"포장해서 말한다면야 그랬지."

신경전. 아엘로트는 평소보다 느릿하게 답하며 이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런데 지금 올 줄은 어떻게 - "

"물론 디오네 선배님의 카드 덕분이죠."

 

이럴 줄 알았어.

 

아엘로트는 거기에 아무 말 않고 다시 아까 전의 시계를 슬쩍 보았다. 1분 정도 지났나. 그렇다면 슈발만과 루코는 지금쯤 10층을 거의 다 나갔을 것이다. 중간에 쉬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슈발만에게 미리 길은 설명해두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일할 적,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자주 애용하던 그만의 탈출 루트.

아엘로트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이잔 말고 다른 사람들이 아엘로트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래도 달려들어 자신을 붙잡는다든가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잔이 미리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 그래도 선배라고 봐 주는 건가?

그나저나 1분이라면 슈발만과 루코가 탈출했을지 몰라도 연구실 구석에 숨겨둔 노트북이 중요한 파일들을 웹하드에 업로드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1분만 더 버티면 어떻게든 될 거 같기도 한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구실의 불이 다 켜진 덕에 그 노트북이 켜져 있는지 어쩐지 보이지 않아 들킬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들어줄 것 같진 않지만, 디오네는 여기서 빼 둬. 그 애는 아무 관련 없어."

"선배님께 카드키를 넘겨줬지 않습니까."

"놓고 갔을 뿐이야."

 

거짓말을 던져본다. 이잔이 과연 믿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역시 안 믿는군. 이잔은 자신만큼이나 판단력이 좋았다. 오죽하면 셋이 같이 학교를 다녔던 중학교 시절, 디오네가 '너희 둘이 머리 싸움하면 세상이 끝나도 결판나지 않았을 거야'라며 넌더리를 냈었을까.

 

"그 애가 불이익이라도 당하면 가만두지 않을테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음, 그건 실언이었군. 아엘로트는 멋대로 해 버린 말을 곱씹었다. 내가 뭐 어떻게 해 줄 수는 없겠네...그런 생각을 일부러 한가하게 하면서 시계를 본다.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슬슬 1분이 더 지나려고 하는군. 이 정도면 파일도 다 전송이 됐을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살짝 넣어 클립을 집는다. 그걸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린 뒤, 집으려고 몸을 굽혔다. 순간 이잔의 눈이 커졌다.

 

"선배님이야말로 허튼 짓 하시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이잔, 경어 사이에 '짓'이란 단어가 들어간 거 같은데 그거 올바른 문법이야?"

"장난치지 마시죠."

"진지하게 말한 건데?"

그러면서 바닥의 클립을 집기 전에, 바닥에 있던 플러그 하나를 잡았다. 아까 미리 뽑아둔 플러그였다. 책상 밑에 있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아엘로트가 뭘 집었는지 못 본 모양이지만.

"선배님, 저희를 막으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클립을 플러그에 끼웠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잘못 됐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그러시겠지."

 

그리고 아엘로트는 책상 아래에서 얼굴을 들어 다시 이잔을 똑바로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남의 삶을 짓밟는 공공의 이익 따위는 얻고 싶지 않아."

 

'팟'

 

"뭐지?!"

갑작스런 정전이다. 연구실도, 복도도. 앞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 - 윽!"

누군가가 무언가에 맞아 바닥에 엎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상문이 철컥 열렸다 쾅 닫혔다.

"뒤쫓아!"

엎어진 사람이 소리지르자 사람들이 비상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슈발만씨, 거기 상황 어떻대?"

수풀 속. 넷북으로 자료들을 한참 둘러보고 있던 루코가 막 통화를 끝낸 슈발만을 쳐다보았다.

"좀 전에 시작된 모양이더라...아직까지는 괜찮대."

그렇게 답하면서도 편치 않은 슈발만이었다. 그래도 아엘로트가 웹하드를 통해 전송해준 파일이나 루코가 USB로 얻어온 파일들의 내용을 최대한 엘핀도스에게 알려주었다. 이 정도면 그들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사..해야 할텐데, 무사하겠지?"

루코는 겨우 웃는 얼굴을 하면서 넷북을 닫아 절전 모드를 만들었다. 대마법사님도, 이실리아씨도, 소마도, 모두 잘 하고 있을 것이다. 슈발만도 같은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아엘로트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어라? 슈발만씨, 저기 저기 저기 - !"

루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슈발만이 쳐다 봤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건물의 10층. 아까까지만 해도 불이 다 켜져 있던 10층의 전기가 나가 있었다?!

 

 

너무 여유부렸나.

이잔은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아리엘은 학생 시절에도 모범생 이미지와는 맞지 않게 탈출 루트를 잘 개척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저렇게 도망가 버렸으니,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잡을 마음이 별로 없기는 했다만. 그도 아리엘의 말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프로젝트 타르타로스는 분명 공공의 이익이 목적이었지만 결코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것은 자신의 일이었다. 지금은 옛 정보다 일에 충실해야겠지. 그게 현실이다, 라는 게 이잔의 생각이었다.

그는 휴대 전화를 들어 미리 1층에 대기시켜놓았던 경비업체 사람들에 연락을 했다.

 

 

--------------------------------------------------------------------------------------------------

 

* 여러분.

클립을 플러그에 끼워 콘센트에 꽂는 일 절대 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저기 써 먹었다고 절대 하시면 안 돼요! 화재의 위험이 있습니다!!!

...

저는 '괴물' 영화에서 봤던 걸 써먹었을 뿐이구요<<

 

* 엘핀도스의 휴대폰 벨소리는 LOOP입니다<<

* 지금 생각해보니....이 소설을 보고 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올 사람은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