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19)
타르타로스 공식 카페(http://cafe.naver.com/tata0)에 올렸던 소설 모음입니다.
그 당시 썼던 글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 곧 시험 기간이 다가오는군요-여러분 모두 화이팅!
*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 행운 버프를 확확 레벨5까지 받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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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정말 아리엘 맞는 거야?"
"그래, 맞아."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계속 자신의 본명을 불러주는 것을 들으면서 아엘로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최근 몇 년간 들어보지 못했던 자신의 본명 '아리엘.'
".......참 빨리도 연락하시는군."
한참 뜸들이던 디오네가 겨우 그렇게 한 마디 내뱉자 아엘로트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하하, 말버릇 고약한 건 여전하네."
원래 그런 여자였다, 디오네는.
"...하아? 웃어?!"
"아니, 거의 사오년 만에 목소리 들어보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서."
"뭐,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만."
살짝 열이 올랐던 디오네의 목소리는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우연인데? 나도 네게 연락할 방법을 찾으려던 참이었는데."
디오네가..? 무슨 일로?
"음, 그래? 그럼 지금 만날 수 있는 거야?"
"갑작스럽지만 지금 당장 일정은 없으니 괜찮아."
"내가 갈게. 어디야?"
전혀 안 그렇게 들렸지만 디오네는 아리엘에게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음을 수화기 너머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녀석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못 속인다. 어쨌거나, 그녀는 아리엘이 이렇게 다급하게 약속을 잡으려 하는 것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말이야.
"어디라고 물어봐도 내가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
아리엘이 피식하는 소리를 들은 디오네는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급하면 국가 정보원에 근무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재지를 함부로 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저럴까.
"옛날에 자주 갔던 커피숍 기억나?"
"거기 아직도 있어?"
"그래그래. 구석진 데라 사람도 얼마 없지만 커피는 잘 끓이는 곳. 거기로 와. 길은 알아서 찾고."
"네 네."
"그럼 몇 분 후에 도착할 거 같아?"
"...한 3-40분 잡아야겠는데."
"40분 뒤라. 늦으면 죽을 줄 알아."
"네 네."
디오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뒤로 나자빠졌을 것이다. 그럴 정도로 디오네의 외모는 조신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디오네로부터 이런 협박성 발언을 수백 번은 들어왔기 때문에 오히려 장난기를 담아 대답했다.
"그럼 이따 보자."
"그래."
'탁'
휴대 전화의 폴더를 덮었다.
이로서 거의 5년만의 재회가 되는 건가.
디오네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얽혔다. 아리엘로부터의 오랜만의 전화에도 마치 방금 헤어진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는 것처럼 꽤나 태연하게 통화를 했다는 자신에 대한 평가부터, 이 녀석은 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갑자기 자신을 찾는 건가 하는 의문까지.
언제나 그랬다. 아리엘은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냈었고,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겨서는, 이번에 또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냥 보면 여유가 넘쳐흐르는 소위 '능글공'인데 그렇다고 느긋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어딜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이런 것이야말로 변덕이 아닐까, 디오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만나는데, 조금은 설레보기로 할까. 5년이라는 기간은 그리 짧은 기간이 아니다. 아리엘의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디오네는 궁금해졌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아리엘이란 녀석은 말 그대로 천재였다. 하늘이 내린 인재. 그는 디오네와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동시에 중학교까지 같이 나왔다. 다만, 동갑인 주제에 월반이란 것에 힘입어 고등학교를 먼저 들어가더니 졸업도 조기 졸업으로 후다닥 해치워버렸다는 게 얄미운 친구였다. 더 밉살스러운 건, 그 조기 졸업이란 게 국가 정보원의 스카우트를 받아서 성사되었다는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디오네는 머리가 다시 열을 받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뭐, 사실 자신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일찍 사회에 나가 함께 동경해오던 국가 정보원이란 곳에 덜컥 먼저 가 버린 아리엘 때문에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던 어릴 적의 디오네는, 자신도 폐인마냥 방에 쳐박혀 미친 듯이(디오네는 그렇게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회고했다) 공부해 명문대에 진학했고, 그 대학교에서 추천을 받아 남들보다 일찍 정보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특히나 가까운 친구가 자기보다 잘 되면 어쩐지 배가 아프더라-는 것이 디오네의 입장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제야 2년차이다. 만약 아리엘이 그 좋은 직장만 때려치지 않았다면 자신의 직장 선배였겠지. 그건 정말로 배아플 일이다.
가게의 이름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엘로트가 커피숍을 제대로 찾아 들어갔을 때, 디오네는 이미 그 구석진 가게에서도 구석진 자리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5년만에 본 디오네는 변한 게 없었다. 아, 머리 길이가 좀 변한 것 같기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디오네의 금발 머리는 컬이 진 채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으니 딱히 달라보이지는 않았다.
"하아," 자기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아엘로트를 발견한 디오네는 처음부터 질린다는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아, 머리는 좀 길었나?"
같은 생각을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아엘로트는 쿡 웃어버렸다. 뭐가 그리 우습냐, 맘대로 웃지말라고 말하는 듯이 노려보는 디오네의 앞에 비로소 앉은 아엘로트는 능숙하게 테이블 한 켠에 세워져 있던 작은 메뉴판을 친구 앞으로 갖다 놓았다.
"그런데, 네 용건이 뭐지?"
두 사람이 커피를 주문하는 것을 끝내자마자 물어오는 디오네.
"아아......"
아엘로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여기로 오는 동안 어떻게 말을 꺼낼지 대충 생각은 해 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매사에 빈틈없는 사람이라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혹시 레나르트 아파트, 알아?"
디오네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기야 알지만."
"정보원에서 그 쪽 관련해서 무언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나 싶어서."
단도직입.
그 말을 듣고 디오네는 잠시 경직되었다가, 곧 팔짱을 끼며 풀어졌다. "굉장한데. 좋은 정보통을 가지고 있나 보지?"
"무슨 말이야?"
"아까 나도 연락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고 했잖아." 디오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행하고 있거든. 프로젝트 타르타로스."
역시 그랬었던 건가.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한 아엘로트는 그저 조용히 있었다. 갑자기 다음 의문에 봉착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디오네가 어째서 자신에게 연락을..?
"그래서 말인데, 원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해서 널 수소문해서 찾아내볼까 하던 참에, 네가 먼저 전화를 해 준 거지."
그랬구나. 아엘로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프로젝트 타르타로스. 슈발만이 말해준 바에 의하면 정보원 외부에서는 타르타로스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그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프로젝트였다. 대략, 레나르트 아파트 단지 일대를 점거해 건물 철거를 진행한다는 내용의 임무.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아엘로트 자신이 국가 정보원에 들어와서 맡게 된 첫 임무이기도 했다.
당시 아엘로트는 겨우 18세, 통상 고2밖에는 되지 않는 나이였다. 게다가 직장에서는 소위 말해서 '신참' '풋내기' 수준이었다. 막 동경하던 직장에서 일하게 됐던 아리엘이라는 꼬맹이는 당연히 처음 맡은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그 프로젝트가,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될 줄을 그 때 알았더라면.
그 때 프로젝트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리엘은 관심이 없었다. 그는 프로젝트의 목적보다는 그런 것을 수행할 때 거치는 과정 등 정보원에서의 업무 전반에 관해 더 배우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리엘이 참여하게 된 계기는 자기가 자원한 것이 아니라 정부 측에서 그의 부서 쪽으로 공문이 내려왔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타르타로스 사건'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라는 게 아리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건 없을 것 같은데?"
"아아. 도와줄 건 많아."
아엘로트의 말에 디오네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목적지까지 루트 중에 네가 짠 것도 있고, 네가 설계한 프로그램들 중에 이번에 맞게 수정해야 할 것도 있고...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 우리로서 경험자라면 대환영이지."
"다른 사람 알아봐."
후아, 딱 잘라서 거절한다. 그래, 프로젝트 이름 나왔을 때부터 애가 싸늘해지더니, 내 이럴 줄 알았지. 디오네는 막 받아든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한 마디.
"죄의식 가지고 있는 거지?"
"......."
상대방은 커피만 홀짝이며 한참동안 말이 없다. 침묵을 가장한 긍정이겠지.
디오네가 정보원에 들어오기 이전에 시작됐던, 그리고 중단되었다가 이제 다시 시작하는 프로젝트 타르타로스의 첫 번째 결과는 좋지 않았다. 디오네도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민간인에게 위협은 가하되 해를 끼칠 의도는 없었던 프로젝트가 어떤 이유에선지 살인극을 만들어내고 말았다-고 했다.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정부에서 재빠르게 언론의 입을 막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5년 전의 사건은 일반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있는 채였다.
그랬으니 프로젝트에 가담했던 아리엘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실은 아리엘도 디오네처럼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한참 후에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 디오네 자신이 그 이야기를 들려줬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 때면 아리엘이 갑갑하다면서 홀연히 정보원을 나와 혼자 여기 저기 떠돌아다녔을 시기로, 그나마 디오네와는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였다.
"...너 정말 그거 할 거야?"
"응?"
디오네는 무슨 말이냐며 아엘로트의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가능하면 그 프로젝트에서 나왔으면 좋겠어."
"그건 왜?"
"그걸 몰라서 물어?"
아리엘 화났다, 화났다. 디오네는 다시 팔짱을 꼈다.
"그래, 나도 알아. 프로젝트의 저번 결과는 실패였어. 그것도 피비린내나게 끝나버렸 - 미안. 하여간, 네가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건 알아. 그래서 나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는 것도 이해하는데," 디오네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될 일이야?"
"...역시 그렇지? 네가 중단시킬 방법도 없을테고."
"그거야 당연-뭐?????"
디오네는 한 모금 더 마시려다 말고 멈췄다. 이 친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요?
"왜 그렇게 놀래?"
아엘로트는 디오네의 큰 반응에도 태연히 미소짓고 있었다. 하아. 속과 다르게 웃는 것 좀 봐. 난 이래서 아리엘 녀석이 무서워.
"중단이라니-너 설마......."
디오네는 머리의 회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그래, 단순히 정보원에서 지금 수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느냐는 질문 따위로 자신을 직접 만나자고 전화할 아리엘이 아니었다. "...날 앞세워서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려고 했었던 거야?"
"오해하지 마. 지인을 이용해먹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조금 기분이 나빴는지 아엘로트가 투덜대는 어조로 대답을 했다. "한다면 내가 직접 해."
"......."
디오네는 아엘로트를 똑바로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 녀석이 이러는 걸까. "왜 중단시키고 싶어하는 거야?"
"정말 모르는구나." 아엘로트도 지지 않고 디오네와 눈길을 마주한다.
"아리엘, 이번 프로젝트가 5년 전의 연장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까지 같으리란 법은 없어."
"물론 다르리란 법도 없지."
"하지만," 디오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애초부터 그런 피해가 발생했던 것은 예상 외 결과였어. 이 프로젝트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야. 공익을 위한 거라구."
모르는 바 아니다. 레나르트 아파트 단지는 철거 대상 지역이었다. 재개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공익이라는 거야. 적어도 레나르트 아파트 사람들에게는 이익이 아닌 손해가 되돌아왔었잖아."
그런 말이 아엘로트로부터 툭 튀어나왔다.
"....흠."
디오네는 커피를 갑자기 쭉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았다. "수상하네. 내가 아는 아리엘은 그렇게까지 모르는 사람들 일에 신경써주는 착한 애가 아니었는데."
"아아. 반성하고 있어."
뼈저리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디오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 뭔가 있었던 거지, 라는 자신의 확신을 확인시켜달라는 디오네로부터의 협박에 가까웠다.
"......."
아엘로트는 자신의 커피잔을 내려다보다가, 자신도 디오네처럼 훅 들이켜버렸다. 도리어 디오네가 놀랐다. 얘 오늘 정말 왜 이래? 아리엘이 은근히 많이 변했기는 한 모양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한 디오네.
"오늘 시간 많아?"
"...어..그러니까, 앞으로 일정은 없으니까..."
"그럼 같이 와 줄 수 있겠어?"
그러면서 아엘로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이거 완전히 자기 멋대로잖아! 디오네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리엘이니까 따라간다.
커피숍을 나오기 직전 아엘로트는 다시 가게 안에 걸려있는 커다란 벽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늦겠지만, 이실리아씨 집에서 과자를 먹을 타이밍은 크게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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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렇게 길어질 편수가 아니었는데, 다음 편으로 끊어야겠네요 으억!
* 학교에서 급히 쓰느라 퇴고도 제대로 안 하고 썼더니 아엘이와 디오네가 엉망이 됐어요 크헝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