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간 독이 트라우마가 되겠어이러다간 독이 트라우마가 되겠어
Posted at 2011. 3. 29. 01:56 | Posted in 소설/단편_SS플젝 하나 끝난 겸 기분도 꿀꿀해서 감상적이 된 겸 MSN 대화 저장해 둔 거 보다가 썰이나 풀 겸 해서 써 보는 정신나간 루코아엘 SS
BGM - 혼자서 (미연시 '수평선까지 몇 마일?'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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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석푸석, 발 밑에서 밟혀 부서지는 낙엽들이 내는 소리가 유난히 큰 게 기분 나쁘다. 키 큰 나무들이 죄다 그 가지들을 뻗어 나뭇잎을 매단 덕에 그나마 햇빛 따갑게 쐬이는 건 면했다. 하지만 좀 전까지만 해도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지금은 조용한 숲에서 루코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아까처럼 또 기습당하고만다. 게다가.
"괜찮아? 좀 쉴까?"
"아뇨…. 괜찮습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이 사람 때문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게 왜 앞으로 달려들어서……."
말을 하다 말고 루코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루코와 그 동료들은 마나루스 산에 가기 위해 이 숲을 통과하는 도중 숲의 몬스터들에게 기습을 당했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원정대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연히 같이 떨어지게 된 루코와 아엘로트는 어떻게든 적을 처치해 포위망을 탈출할 수는 있었지만,
"루코씨!!!"
전투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방심하고 있던 차에 등 뒤로부터 공격이 날아온 것을 아엘로트가 막았던 것이다. 맨몸으로.
자신 때문에 동료를 다치게 하다니, 카버샤드 무사로서 면목이 없다. 게다가 아엘로트의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게 보였다. 어릴 때부터 항상 지적받았던, 자칫하면 경계를 늦추기 일쑤인 자신의 약점이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드러나다니.
보기 괴로웠지만, 아엘로트의 얼굴 쪽으로 살짝 곁눈질했다. 제딴에는 호흡까지 조절해가면서 괜찮은 척 하려는 모양인데,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 때문에 사람 속이기는 글렀다.
"역시 안 되겠어. 좀 쉬자. 안 그러면 당신이 못 버틸 것 같아."
"……."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루코는 근처에 있는 나무기둥에 아엘로트를 옮겨 앉혔다. 그러고보니 어디가 다쳤는지 아직 물어보질 못했군.
적에게서 벗어나자마자 부상자도 있겠다, 일단 숲을 빠져나가야겠다고 강행군을 했던 두 사람이었다. 정작 어떻게 부상당했는지는 미처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루코는 그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돌발 상황에 좀 더 냉철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할 수 있었을텐데. 이래가지고서야 카버샤드의 당주라고 명함도 못 내밀겠다.
"…맞은 데가 어느 쪽이야?"
"아……."
아엘로트가 가리킨 곳은 자신의 뒷목이었다. 루코가 아엘로트의 뒷머리를 잡아 올리고 살펴보니 날카롭게 찔린 흔적이 있었다. 찔린 부위 주위로 남아있는 혈흔이 검다. …검은 색?
"당신 설마…."
속에서 뭔가 덜컥 하고 뒤집혔다. 말라붙은 검은 핏자국을 보다가 루코는, "가만히 있어봐" 라고 말하고 나서 바로 고개를 숙였다.
"큿!!!"
갑자기 뒷목으로부터 덮쳐오는 통증에 아엘로트가 신음했다. 상처 자국이 빨린 것을 깨달은 건 곧이어 '퉷'하고 루코가 무언가를 땅에 뱉어내는 소리를 듣고 난 후였다.
"…젠장……."
땅에 뱉어낸 것의 색을 본 루코는 절망했다.
새까만 핏물. 독이었다.
아엘로트는 독침 같은 것에 맞은 게 분명했다. 그러고서 자신에게 반 업힌 채였다고는 해도 꽤 먼 거리를 이동했으니 독이 몸에 꽤 많이 퍼졌을 것이다. 왜 독침에 맞았다고 말을 안 했느냐고 질책하고 싶어도, 아엘로트 자신조차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는 것 같았다.
동료가 그냥 외상도 아니고 독침에 부상당했으니 계획 변경이다. 독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몸의 움직임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이동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한 장소에 붙박혀 있는 대신 이곳의 위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미미라도 있었으면 미미를 보내 길을 찾게 시켜도 됐겠지만,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루코와 아엘로트 둘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엘로트를 여기 두고 혼자 다른 사람들을 찾으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뭇잎을 태워서 연기를 흘려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루코가 고민하는 것을 본 아엘로트의 한 마디. 입 열지 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일리있는 말이었기에 루코는 그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불씨는 어디서 구해야 하지."
그러자 아엘로트가 조용히 손가락으로 옆의 땅바닥에다 무언가를 그린다. 원 안에 알 수 없는 문자가 쓰인 형태. 그런 것을 흙바닥에 대고 표시하다가 다 됐다는 듯 손가락을 떼니 그 자리에서 불씨가 피어올랐다. 술법진이었나.
"…술법도 쓰면 안 돼. 괜히 힘쓰지 마."
불씨를 나뭇잎에 옮기면서 루코가 결국 잔소리 한 번 했다. 그나마 노숙할 때 캠프파이어를 피울 때 가끔 선보이던 술법이 아닌, 아주 작은 불씨를 피운 것만 봐서는 아엘로트도 알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나뭇잎 위에 얹혀 탈 듯 말 듯한 불씨에 대고 손으로 바람을 부쳐주니 다행히도 나뭇잎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여기에 슬슬 다른 나뭇잎들을 주워다 놓아, 즉석에서 모닥불을 만들었다.
"뭐, 이 정도면 됐겠지?"
어느 정도 연기가 두꺼워지고 나서야 루코가 모닥불로부터 한 발짝 물러섰다. 이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언가 이곳에서 나갈 방법, 혹은 다른 동료들을 만날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깊은 숲이다보니 후자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니트라면 독을 치료할 방법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죄송합니다."
생각에 빠진 채 주위를 맴돌고 있던 루코가 고개를 들었다. 아엘로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생기가 없는 게 평소의 그 아엘로트라는 사람 같지가 않아 보였다. 다른 사람 같다.
겹쳐보이는 사람이 있다. 흑발. 핏기 하나 없는 얼굴. 아, 회상은 그만 두자. 좋지 않아.
"말하지 마. 최대한 안 움직이는 게 좋다니까."
괜히 아엘로트에게 한 마디 더 했다. 물론 루코도 알고 있었다, 그도 일부러 심호흡을 느리게 하면서 최대한 독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뭐가 미안한지도 안다. 사실 이렇게 된 건 자신의 잘못인데, 미안해야 할 것은 도리어 이쪽이다.
그런데.
'슥'
"?!!!!"
숲의 정적에 잡음 하나가 파고 들어왔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루코는 곧바로 경계 태세를 취하며 아엘로트가 앉아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엘로트도 감지한 것 같았다.
몬스터다.
또 다시 기습당하는 건가. 루코는 허리춤에 매달린 표창 위에 손을 얹었다. 아까 전과 같은 상황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이 불리하다. 그 때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지금의 아엘로트는 움직일 수조차 없다.
"이런…. 이번엔 아주 떼거지인 것 같은데…."
점점 커져오는 발소리들로 적의 머릿수를 가늠해보았다. 이전보다 대여섯 마리는 더 많아진 것 같다.
"루코씨 - "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어떻게든 해 볼테니까."
아엘로트를 움직이게 하면 안 된다. 루코는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적들을 유인해서 멀리 끌고 가 처리하는 방법은, 이들이 벌써 아엘로트의 존재를 알고 있는 한 불가능할 것 같았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아엘로트까지도 공격할 것이 뻔했다.
"…숫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혼자서는…."
그렇다고 이제 말하기도 버거워하는 사람을 싸우게 할 수는 없다. 루코는 아엘로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절대…안 되는데…….
"루코씨."
아 왜,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고 쏘아붙여주려다가, 루코는 그만 보고 말았다. 아엘로트는 결심을 굳게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연한 표정. 절대로 의견을 굽히지 않겠다는.
"싸우게 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질끈, 눈을 감았다. 겹친다. 정말 딱 겹친다. 어째서.
어째서 언니와.
이제는 몬스터들이 그르릉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루코는 감았던 눈을 힘주어 떴다. 시야에 들어오는 아엘로트의 얼굴은 변하지 않은 그대로다. 하는 수 없다. 아엘로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최대한 제자리에 있어. 괜히 왔다갔다 하지 말고. 그래도 옆에 불이 있으니까 당신 쪽으로는 쉽사리 접근하지 못할 거야."
"알겠습니다."
아엘로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몬스터들의 공격이 덮쳐 왔다. 시작이다. 루코는 힘있게 지면을 박차 뛰어올랐다. 가능한한 아엘로트가 검을 휘두르는 일은 없게 해야 했다. 그러려면 이쪽으로 공격을 유도하는 수밖에 - !
"헉 - 헉 - "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루코가 겨우내 숨을 골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적이 포위해 와서, 또 한 번 힘겨운 싸움을 치렀다. 이제 막 마지막 몬스터의 숨통을 끊었다. 이리저리 몬스터들을 유도하느라 볼매냥과 트랩을 동분서주하며 깔았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후우…."
고개를 들어 보니, 아엘로트는 용케도 모닥불 옆의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듯 했다. 하지만 서 있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저 녀석의 상태를 보러 가야겠다고 루코가 일어서자,
"!!!"
거의 동시에 아엘로트가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한달음에 옆으로 달려갔다. 몬스터들의 피로 얼룩진 바닥에 쓰러진 아엘로트의 호흡이 거칠다. 지금 보니 이마에 땀까지 맺혀 있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
"저 - 저기, 정신차려!"
어찌할 줄 몰라 어깨를 잡아보지만 차마 흔들지도 못하겠다.
"…루코씨……."
아엘로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마 의식은 있는 상태였지만, 말을 잇는 것이 힘들어보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 무언가를 자꾸 말하려고 한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
루코가 버럭 소리질렀다. 곧바로 후회해 버렸지만.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
"아윽!!!"
갑자기 아엘로트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아픔을 참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되살아나는 장면이 있었다. 아까부터 겹쳐보이던 언니가 독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져 버린. 그런 생각이 들자, 루코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싫어……."
힘겹게 잡아두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뚝뚝, 루코의 두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본 아엘로트가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루코의 한 손을 잡았다. 그러자 루코가 다른 손으로 아엘로트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
아엘로트의 시선이 맞잡은 손으로 향하더니, 눈이 스르르 감긴다. 손에서도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 루코가 아엘로트의 손을 꽉 쥐었다.
설마, 그럴 리가 -
"정신차려, 좀만 더 버티란 말야!"
"……."
그럴 리가 없어 -
"…아엘로트……."
처음으로 불러보았다. 이제서야. 이제는 소용이 없는데.
"…아엘로트, 정신차려, 아엘로트 - !!!"
그것을 깨달아버린 루코의 오열이 숲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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