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32) - 完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32) - 完

Posted at 2011. 2. 28. 14:15 | Posted in 소설/레나르트아파트에어서오세요

마지막 회입니다.
개강 전에 완결내고 싶다는 목표는 지키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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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크로모도는 한숨을 쉬었다. 퀸시의 잔소리를 들으며 아파트 옥상의 화분들을 정리하는 일이 겨우 얼마 전에 마무리되었는데, 자기 할 일도 제대로 시작 못한 채 오늘은 분홍 머리 꼬맹이네 집에 내려와서 로봇의 해체를 돕고 있었다. 원래 한낮 중 가장 더울 시간이니 방에 커튼을 쳐 놓고 낮잠을 자거나 했을 수도 있겠지만 핑코가 전날 급하게 연락하는 바람에 이러고 있다.

하긴, 오늘은 '그 날'이기도 하고, 불만은 없다.

"모로 선생, 이제 됐어?"

핑코가 탱이의 몸체 뒤에서 얼굴을 쏙 빼고 묻는다. 드라이버로 탱이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몸체에 고정하고 있던 볼트를 막 빼낸 참이었다.

"일단 팔 먼저 옆에 놔 두고, 그 다음에 다리를 분리하지. 알퐁스!"
"왈!"
"이리 와서 이것 좀 들어."

역시 평소 같았으면 낮잠을 잘 시간에 핑코에게 불려와서 - 정확하게는 주인에게 강제로 끌려와서 - 일하고 있는 알퐁스도 별 불만없이 핑코와 크로모도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럴만도 하다. 크로모도는 탱이의 왼쪽 팔을 들다말고 거실 한 켠에 세워져 있는 캐리어 가방을 보았다. 그 동안 쭉 혼자 살아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이삿짐이 적었다. 저 조그마한 어린이용 캐리어에 물건이 다 들어갈 정도라니까. 아, 책 같은 건 미리 친척집으로 부쳤다고 했던가.




핑코가 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핑코의 어머니와 안면이 있었던 크로모도가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도 그 때 쯤이었다. 레나르트 아파트의 상황이 안정되고 나서 재개된 그 야식 모임의 첫 번째 날, 핑코가 모두에게 말해버렸던 것이다. 아파트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던 핑코였기에, 그리고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들 단번에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핑코는 아무래도 더 넓은 세상에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 후 사나흘 동안 핑코는 물론이고 슈발만이나 이실리아 등 2동 사람들도 꽤 바빠졌다. 핑코가 유학을 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행정 절차 때문에 이실리아가 핑코와 함께 학교 교무실을 들락날락거렸고, 동물귀 펄럭이는 아가씨는 짐싸는 것을 도와준다고 핑코네 집에 한동안 상주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핑코의 송별회를 준비한답시고 분주했고. 물론 그래봤자 송별회 음식 메뉴가 핀더스 카페 와플 세트라든지 그 쪽 메뉴일 것은 뻔했지만. 그래도 핑코는 송별회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듯 했었다. 그게 벌써 전날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오후 출발하기 전에, 핑코가 송별회 끝나고 부탁한 게 있어서 크로모도가 몸소 탱이의 해체를 도우러 온 것이었다. 핑코의 아버님의 영혼이 붙어있는 로봇이니 이 꼬마 혼자 해체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아는가. 게다가.

"임시 방편이긴 하지만, 마력을 공급하는 장치다."
"오오, 그게 있으면 거기 가서도 탱이가 잘 작동하는 거겠네?"

핑코의 반응을 보니 밤새서 만든 보람이 있다. 레나르트 아파트의 마법진의 힘으로 작동하던 탱이가 외국에 가면, 동력원이 없이는 작동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마력을 공급해주는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꼬맹이가 외국에 적응할 동안은 잘 작용해 주겠지, 해서.

"다 됐나?"
"됐군."

어찌어찌, 로봇의 해체가 끝났다. 탱이의 부품들을 따로 종이박스 안에 넣어서 청테이프로 상자를 둘둘 싸매는 핑코를 보다가, 크로모도는 계속 머릿속에 떠돌던 질문을 던졌다.

"진심인가?"
"뭐가?"
"가는 거 말이다."

핑코가 씨익 웃었다.

"자기 인생 살라고 한 건 모로 선생이었잖아. 나라고 떠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난 아직 누구보다 살 날이 많단 말이지. 세상엔 배울 것도 많고 볼 것도 많고 아직 안 해 본 것도 많다구? 그러니까."

그 누구가 나냐. 은근슬쩍 꼬인 말에 살짝 기분이 상할 뻔했지만, 그래도 아직 10년 정도밖에 살지 않은 꼬마 아이가 생각이 남다르구나, 그렇게 크로모도는 상황을 넘겼다. 유학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 적은 있었는데, 그 한 마디가 그렇게 큰 역할을 했나 싶기도 했다.

"이제 정말 끝인가."
"그런 것 같네."
"그럼 난 내려 가 있겠다."

크로모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있으면 핑코의 친척되는 그 사람이 핑코를 데리러 직접 레나르트 아파트로 찾아올 것이다. 마침 잠시 귀국했다고 해서 오는 김에 핑코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나 뭐라나. 그래서 2동 사람들은 아파트 단지에서 핑코를 배웅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2동 입구 앞으로 크로모도도 내려가려는데.

"모로 선생, 있잖아, 나 그거 한 번 해 보고 싶었는데."
"음?"
"가기 전에 한 번만 해 보면 안 돼?"

뭘? 크로모도가 뒤돌아 핑코를 보니, 아니 이 아이가 두 팔을 쫙 벌리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뭐 - 뭐야?!?!"

설마 이건 껴안기 스킬?! 갑자기 달려드는 핑코에 크로모도는 반사적으로 눈 꽉 감고 뭔가가 푹 안기기를 기다렸지만,

"알퐁스~ 역시 푹신푹신하구나!"

그럼 그렇지. 눈을 떠 보니 핑코는 옆에 있던 알퐁스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너무 그러면 정들어. 이리와 알퐁스."

알퐁스를 핑코로부터 떼어놓고 크로모도는 핑코의 집을 나섰다. 등 뒤에 핑코가 조그맣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서 한 손 들어 가볍게 답해주었다. 이제 이 집도 빈집이 되겠군. 앞으로는 밤에 시끄럽다고 전화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핑코는 크로모도가 1층으로 내려오고 10분 후에 캐리어와 종이 박스를 끌고 아파트 현관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슈발만이 입을 떡 벌렸다. 그래니트와 캐리어 가방을 사러 시내에 갔다 온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상자는 뭐냐.

"핑코, 그건 뭔데 어떻게 들고 가려고?"
"발만씨, 우리 탱이를 잊은 건 아니겠지요?"

그러면서 핑코는 캐리어와 박스를 바닥에 탁 내려놓았다.

"설마 아저씨가 차는 가지고 오시겠지. 아직 안 오셨나? ...안 오셨으면 좋겠다."
"핑코."
"아냐 언니, 농담이었어."

이실리아에게 웃어주고는 핑코는 캐리어 가방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정말 언제 오시려나...너무 늦게 오시면 다들 추운데 밖에서 기다려야 되잖아."
"그렇다면 기다리는 동안 사진이라도 찍을까요?"
"무슨 소리야, 깜장 오빠?"
"사진으로라도 뭔가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핑코가 아엘로트를 올려다보니 아엘로트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일반 소형 디지털 카메라도 아니고 DSLR. 거기에 아예 삼각대까지 뒤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아엘로트는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찍겠다고 준비한 것 같았다. 핑코도 그랬지만 다른 사람들도 언제 이런 걸 가져왔는지 신기하다며 아엘로트의 카메라와 삼각대를 요리조리 구경했다.

"아엘로트씨는 사진에도 취미가 있으셨어요?"
"아무래도 혼자 여행하는 일이 잦다 보니 이런 것도 하나쯤 있어야 싶겠다고 생각해서 사 뒀는데 몇 번 써 보질 않아서 말이죠."

소마의 말에 대답하며 아엘로트는 삼각대의 위치를 옮기고 그 위에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핑코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모두들 핑코씨 주위로 서 주세요."

아엘로트의 말에 루코가 꺄악 하면서 핑코를 등 뒤에서부터 껴안았다. 이실리아가 질세라 핑코의 오른쪽 옆으로 바짝 붙었고 그래니트도 왼쪽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아가 서는 모양이 꼭 각자의 성격이라든지 친밀도를 대변하는 것 같아 아엘로트는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다 말고 픽 웃었다. 특히 슈발만이 은근슬쩍 이실리아 옆쪽으로 발을 옮기는 데에서는 크게 웃고 싶더라니까.

"크로모도씨, 좀 더 안쪽으로 와 주세요. 크로모도씨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요."
"뭘 또 더 - "
"아이, 왜 그래 모로 선생! 이왕 찍는 거 아예 가운데쪽으로 와! 키도 크니까 뒤에 서도 잘 나오겠네."

조금은 멀찍이 서 있던 크로모도를 루코 뒤에 배치시키는 것으로 조정이 끝났다. 알퐁스까지 해서 이 대인원이 사진 한 장에 들어간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만큼 모두들 최대한 중앙의 핑코 쪽으로 밀착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한 번 찍어볼게요! 하나 - 둘 -  셋 - "

찰칵. 플래시가 터지자 기쓰고 밀착해 있던 사람들이 죄다 푸우 하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정말이지 꽉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메라의 버튼을 눌러 찍은 사진을 체크하니 이 정도 구도면 잘 나올 것 같았다. 어딘가 빈 것 같아보이기도 하지만, 모두 다 나왔으니까 상관없으려나.

"아까처럼 찍으면 될 거 같아요. 한 번 더 - "
"잠깐, 아엘로트?"
"예?"

카메라의 화면을 보다말고 얼굴을 들자 슈발만이 물었다. "그거 자동으로 사진 찍는 기능은 없는 거야?"
"네?"
"넌 안 찍냐고."

아. 그런가.

"........그러니까...자동으로 찍는 기능이..."

몇 번 사용해 본 적도 없거니와 사용한다고 해도 풍경이라든지 다른 사물을 찍느라 자신의 사진을 찍는데는 사용해보질 않았다. 카메라의 메뉴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아엘로트 옆으로 어느새 소마가 와서 "이거 아닐까요?" 하며 타이머 기능을 찾아주었다.

"아엘로트씨는 그래니트씨 앞에 앉아계시면 딱 맞춰서 나오겠는데요?"

게다가 자리까지 찾아주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마침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렇구나, 아까 비었다는 느낌이 든 것은 설마 자신이 들어있지 않아서 그랬던 건가.

"깜장 오빠, 빨리!"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소마가 가르쳐 준 타이머 메뉴를 선택한 후 아엘로트는 재빨리 그래니트 앞으로 뛰어와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의 불빛이 한 두 번 켜졌다 꺼졌다 하더니 이내 빠르게 깜박이기 시작했다.

"모두, 웃어!"

핑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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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정말 끝인가. 정말 끝이네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지금까지 완독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선 이런 비루하고도 속도 느린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어요(...) 우아...

사실은 지금 어디 가기 직전에 아침에 써 뒀던 것 다시 한 번 보고 올리는 것이라, 이게 정말 연재가 끝난 게 맞나, 제가 시작해서 끝내놓고도 영 실감이 안 납니다. 아무래도 이따 밤에 소감이라도 써야 할 판인데요? 하하하// 하긴 이 시리즈(?) 쓰는 동안 좀 묻어뒀다거나 비화라거나 안 쓰고 남겨둔 소재 등등이 있어서.

타르타로스 온라인은 물론이고 앞으로 장편 팬픽은 이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하고...싶습니다만 또 모르죠. 마지막인 이유는 역시 학업 관계상, 시간 관계상, 등등. 하지만 또 내키면 중편 정도는...모르겠네요. 생각해보니 저는 글쟁이보단 그림쟁이 쪽인데 어째 연성물은 글이 더 수가 많아...(...)

여하튼. 32편이라는 긴 이야기를 끌어오는 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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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31)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31)

Posted at 2011. 2. 18. 02:09 | Posted in 소설/레나르트아파트에어서오세요

자기 전에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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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명단..?"

갑작스레 맞닥뜨린 말에 굳은 슈발만에게 아엘로트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슈발만씨, 핑코씨의 어머님이 실종되셨다는 말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어...그거라면...아버지 돌아가시고 핑코가 - "
"핑코씨가 말씀하셨다구요?"

아엘로트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할 것 까지야. 슈발만도 흠 - 하며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핑코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사건이 터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수라장이 된 아파트 단지에서 헤매던 핑코를 이웃집 아이라고 알아보고는 여기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니, 엄마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래서 찾고 있다고 했다.

"...전혀 신빙성이 없군요."
"신빙성이 없다니!"
"생각해 보십시오, 슈발만씨. 핑코씨는 겨우 예닐곱살이었어요. 그리고 충격적인 일을 당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 어린 아이로부터 제대로 된 진술을 받아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아엘로트가 냉정하게 짚어낸 것을 슈발만은 별 도리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엘로트의 말이 일리가 있는데다가, 핑코의 어머니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고스란히 있었다니까 -

"그 명단이 틀릴 수도 있잖아!"
"시신 확인하며 작성한 명단일 겁니다. 간단히 틀릴 수 있는 게 아니예요. 그것보다는 어린 아이의 증언이 더 부정확하겠죠."

그렇게 말하는 아엘로트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어떻게 되는 거지. 핑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라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고개를 흔들어 털며 슈발만은 애꿎은 종이컵만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가 없다면 차라리 정말 그 외국의 친척 집에서 살며 영재 교육인가를 받는 편이 좋을 것이다. 타르타로스 사건이 끝난 후라고는 하지만 이 곳은 너무 위험하고 환경도 좋지 않다.

"......."

그 동안 핑코가 엄마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종이컵을 확 구겨버렸다. 화도 난다. 그 녀석이 여태껏 했던 건 다 뭐가 되는 거냐. 종이컵을 확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고개를 든 슈발만은,

"...!"

핑코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피 - 핑코?!"
"엄마가...돌아가셨어?"

젠장, 대화를 들은 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슈발만이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핑코는 카페를 아예 달려나가버렸다.

"핑코!"

당황한 슈발만이 카운터를 훌쩍 뛰어 넘어서 핑코 뒤를 쫓아 나간 탓에, 카운터에는 어안이 벙벙한 아엘로트와 핑코와 함께 카페에 들어 온 유리만 남게 되어 버렸다.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엄마는 어딘가 살아계실 거야. 절대로, 날 두고 돌아가셨을 리가 없잖아.

계속해서 생각했다, 되뇌였다. 발만씨는 아무 것도 모르고 저런 말을 했던 거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 생각하면 할수록 그 사실이 옅어져 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문이 쾅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실리아는 설거지를 하다가 그 소리를 듣고 고무 장갑을 벗었다. 이렇게 예고 없이 벌컥 들어올 사람은 자신이 아는 한 핑코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핑코는,

"...언니...."

얼굴이 눈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핑코를 울릴 정도로 엄청난 일이 일어났나 보다 하고 놀랄 법도 했지만, 이실리아는 언제나 그랬듯이 조용히 핑코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핑코는 제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
"응, 핑코."
"엄마는...엄마는...살아계신 게 아닌가봐...."

그 말을 하자 속이 후련했다. 이상하게 시원해졌다. 갑자기 흐렸던 것들이 모두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그런.

그랬다,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핑코는 이실리아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 울었다. 5년 간 참아왔던 눈물들이 한꺼번에 다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제서야 사실을 인정하는 바람에, 그 눈물을 담고 있었던 그릇이 깨져버렸으니까. 깨진 충격 때문일까, 덮어두고 있었던 과거의 일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라져 이곳저곳을 헤메며 엄마를 찾던 것,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엄마같은 사람이 흰 천 아래에 덮여있던 걸 봐 버렸던 것,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던 것, 그리고 나서 맨 처음 만난 사람에게 엄마를 찾고 있다고 거짓으로 말했던 것. 그 때부터였다. 엄마가 행방불명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은.

"괜찮아......."

거짓말을 했던 자신을 도리어 보듬어주는 이실리아를 붙잡고 핑코는 더 울었다. 계속 울어서, 울어버려서 쌓아두었던 눈물을 다 비워버리기 위해.




핑코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벌써 밖이 깜깜해져 있을 때였다. 이실리아가 핑코에게 저녁밥까지 차려줘서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핑코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집 앞에 앉아있는 슈발만이었다. 엘레베이터의 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을 보고 일어선다.

"핑코, 어디 갔었던 거야?"

무뚝뚝한 성격이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잘 몰랐겠지만, 몇 년을 이웃사촌지간으로 같이 보낸 핑코는 슈발만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몇 시간이고 저 앞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것이다. 아니면 그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왔다거나. 못 말리는 아저씨다.

"발만씨."
"어?"
"엄마...돌아가신 거 맞아......."

이런, 또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슈발만 앞에서 징징거리기 싫어서 핑코가 눈물을 마구 훔쳐댔다. 그런데 슈발만이 그런 핑코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그러지마, 발만씨, 그럼 눈물이 제멋대로 나온단 말이야 - !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결국 그 말도 목이 메여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핑코는 다시 한참동안 울었다. 슈발만 역시 손으로 달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하는 채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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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전에는 완결을 내야. 그리고 거의 다 왔습니다.

후우. 마라톤의 끝이 보이는군요.

읽어주시는 여러분께는 오랜만에 행운 버프를 드립니다 이얍! 회피일 수도 넉백저항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말로 행운을 올려 주는 버프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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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28)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28)

Posted at 2011. 1. 23. 19:55 | Posted in 소설/레나르트아파트에어서오세요

정말로 오랜만에 재개입니다. 이게 몇 달만이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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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과 엘핀도스의 부대 간의 전투로 인해,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요란한 공격 소리가 가득 채워진 아파트 단지. 그 아수라장에서크로모도는 정신없이 그의 애완 동물을 따라 달리던 중이었다. 이때까지 자신과 함께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알퐁스가 돌연 어떤 확신이 들었는지 자신의 옷자락을 물고 끌었기에, 크로모도는 알퐁스를 믿고 뒤따르고 있었다.

"퀸시?!"
"아, 크로모도,"

그리고 다행히도, 알퐁스의 후각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았다. 퀸시는 아파트 2동의 입구 앞에서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게다가 멀쩡하고. 게다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긴급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고 -

"'아, 크로모도,' 라니 너 뭐가 잘나서 그렇게 태평해?!!!"

 그런 퀸시에게 크로모도는 그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실은 무사해서 신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야 할 것을, 너무나도 허탈해서 속에 쌓였던 것이 폭발해 버렸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퀸시도 화를 낸다.

"넌 다른 사람들 도와줘야 될 걸 왜 여기에 와서 이 난리야?!"

퀸시의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

"왈왈!!!!!"

알퐁스가 갑작스럽게 짖어대자 크로모도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알퐁스가 손을 흔들어대는 방향을 보았다. 밤하늘에 흐릿한 무언가가 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 ?!

"위험해!"

순간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크로모도는 냅다 퀸시를 끌어안고 땅으로 엎어졌다. 미사일이다, 적어도 그런 물건이다, 맞으면 끝장이다!

'쾅'
'파지직'
"..음?!"

지면에 도달하기도 전에 터져버린 그 물건과 예측하지 못했던 스파크 튀는 소리에 크로모도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크로모도씨, 괜찮으세요?"
"..너는......."

앞에는 푸른 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오른손 위에 얹혀져 있는 원반 같은 것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파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소마라고 했던가, 이 소환수는 2동 주변이 자기가 맡아 지키기로 한 구역이었지. 그러니 자신들을 구해준 건 이 녀석일 터였다. 그 미사일이란 것은 두 동강이 난 채 저 멀리 땅에 처박혀져 있었다. 그 미사일을 보자 크로모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제는 아예 하늘에서 저런 걸 떨어뜨리는 거냐.

"너무해, 저런 것까지......."

5년 전에는 저런 걸 마구잡이로 떨어뜨렸어. 이 정도면 양반이다. 그렇게 말해주는 대신 크로모도는 퀸시를 일으켜 세워 주고는 소마를 불렀다. 퀸시가 무사한 것도 확인했으니 자신은 또 자신의 일을 하러 가야 했다.

"미안하지만, 이 녀석 좀 내 집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겠나?"
"예,"
"부탁한다,"

잘은 모르지만 왠지 믿음이 가는 소년이다. 크로모도는 소마에게 퀸시를 맡기고는 알퐁스를 데리고 엘핀도스의 막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크로모도의 뒷모습을 쭉 지켜보려던 퀸시를 소마는 얼른 데리고 2동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크로모도의 집은 아파트의 꼭대기층에 있었다. 구식 엘레베이터는 느릿하게 한 층 한 층을 기어올라가는 듯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퀸시가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든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안심시키고 보자는 식으로 대답한 소마는,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능력이 완전하게 발휘되지 않는 몸이라 자신은 2동과 3동 - 미르는 3동에서 대피한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 건물의 범위만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전세는 영 좋게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방금 전의 미사일을 빼 놓고서라도, 특공대를 실은 헬기니 뭐니를 동원해서 공중에서 공격을 하지를 않나, 전면전으로 전경들을 몰아붙이지 않나. 그나마 엘핀도스 군의 마법사들이 어떻게 해 보고는 있는 모양이고 정부군의 공격을 대비해 배리어도 미리 쳐 뒀지만 소마가 보기에 이 싸움은 수적으로도 화력 상으로도 불리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전력이 되질 못하고 있었다. 명색이 이 곳을 지키기 위해 소환된 소환수인데.

"아, 도착했다."

퀸시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래, 여기는 꼭대기 층이었지.

"퀸시씨," 소마가 퀸시를 따라 내리며 물었다.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나요?"

"물론...저 계단을 올라가면 되긴 하는데. 왜?"
"위에서도 상황을 봐 두고 싶어서요. 계속 밑에서만 있느라."
"그렇구나." 퀸시는 얇은 귀를 파닥였다. "행운을 빌어."

감사합니다. 소마는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답한 후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나도 나중에 오토바이 면허 따 볼까 봐."
"그런데 면허 따는 거, 말만큼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흥, 그러셔?"

불안감을 잊으려는 듯 괜히 계속해서 말을 꺼내는 루코와, 그걸 알고 일부러 장단을 맞춰주는 아엘로트, 그리고 두 사람의 뒤에서 말없이 무게중심을 받쳐주고 있는 슈발만 세 사람은 오토바이 한 대를 나눠타고 레나르트 아파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 도로의 통행량이 적어진 덕분에 오토바이를 세 사람이 같이 타고 있다고 태클을 받는다거나 사고가 날 위험은 적은 것이 그나마의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중에 카페 가면 와플 공짜로라도 하나 줘, 솔직히 아까 그 파일들 내가 찾은 거잖아?"
"USB는 슈발만씨께서 찾으셨잖습니까."
"아, 뭐, 어쨌든! 나 단 거 땡겨. 오랜만에 먹고 싶다구. 와플 안 먹은지 오래 됐어."

오래 되었다. 최근 들어 5일간,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준비를 하느라 모두들 암묵적으로 야밤의 다과회는 쉬자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모두 모여 함께 먹고 수다 떨고, 매일마다 해 왔던 그 일상이 지금은 어찌나 그리운지.

"오래 됐군요."

아엘로트도 루코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짧게 말하고는, 핸들을 꽉 쥐었다.

"오래 됐지."

한숨과 함께 슈발만도 한 마디 내뱉었다. 부디 오늘만 지나면 어떻게든 끝나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었지만, 제발 어떻게든 빨리 끝났으면.




철문을 열고 옥상에 들어서니, 아파트 단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소마는 옥상 바닥에 줄지어 서 있는 화분들을 발로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파트의 정문이 있는 방향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정문 쪽에서는 엘핀도스의 군대가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화이어필드의 불길 때문에 정부군 쪽에서 쉽사리 접근을 못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레나르트 아파트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은 최선의 방어 방법이지요.' 라며 몇 시간 전 작전 설명을 시작하던 엘핀도스가 떠올랐다.

"..어?!"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뒤로 돌린 소마의 눈이 단박에 커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파트 단지의 뒤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직감상 저 사람들은 절대 이쪽편이 아니었다. 정부군 쪽일 거다. 빠르게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눈으로 쫓아보니 아파트 단지의 후문 근처에 펠리언이 사람 몇을 데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저 수로는 역부족이다.

'어떻게 하지?'

자신이 지금 펠리언에게로 달려가 그쪽으로 적이 오고 있다고 알리기엔 엘레베이터가 너무 느리다. 그렇다면.
소마는 한 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 전기를 모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선제 공격을 해 주면 된다. 절대, 아파트 단지의 뒤로 쳐들어오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하앗!"

기합 소리와 함께, 소마는 모은 전기를 후문 방향으로 내리꽂았다. 갑자기 지상에 내려친 벼락은 적에게 타격을 입혔을 뿐만이 아니라, 떨어진 곳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펠리언의 주의를 끌어모으기도 했다.

"뭐야, 진짜로 이 쪽으로 쳐들어오려고 그랬네?"

엘핀도스가 슈발만이 건네준 정보를 믿고 자신을 이쪽으로 보냈을 때, 펠리언은 솔직히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오다가 뭐에 맞았는지 휘청거리고 있는 적군들을 보니 슈발만이란 사람이 보통 사람은 아닌가보다, 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나저나 뭐에 맞았길래 저렇게 파리해진 거지?

"어쨌든, 가자 얘들아! 이 때 쓸어버리자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급작스런 적의 방문에 놀란 부하들을 데리고, 펠리언은 적군들을 향해 진격했다. 라이트닝 월이 제대로 먹힌 것을 확인한 소마도 수가 적은 펠리언과 그 동료들을 위해 옥상에서 공격 보조를 했다. 앞에서는 사람이 달려들고 위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난리가 따로 없었다. 전기가 몇 번 튀는 것을 보고서야 펠리언은 위를 쳐다 보고, 푸른 빛의 전기를 모으는 소년을 어렴풋이 분간할 수 있었다. 보일지 어쩔 지는 몰라도 펠리언은 일단 엄지 손가락을 위를 향해 치켜 세워줬다. 요 며칠간 자기 임무에 대해 자신이 없던 꼬맹이였는데 이럴 때 칭찬해 줘야지.
그러느라 펠리언은, 아직 제압하지 못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무전기로 긴급 연락을 취하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레나르트 아파트 단지에 거의 다 왔다. 아엘로트가 "공격 루트는 아파트 단지의 뒤쪽으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한 쪽 방향보다는 여러 방향에서 공략하러 올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 낸 루트는 정면에서 맞붙을 때 뒤를 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죠." 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오토바이는 아파트 단지의 서문을 목표로 달리고 있었다. 앞도 뒤도 아니라면 옆이라는 논리였다.

"엇, 저것 봐! 불난 거 아니야?!"

갑자기 루코가 소리지르며 손가락을 뻗었다. 아파트 단지 쪽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따금 벼락이 내려치는 것도 보였다.

"마법사들이니까 불꽃 날리는 정도야 쉽게 하겠지."
"에?"
"일부러 불을 피운 걸 수도 있어."

아 참, 우리편에는 마법사들이 있었지. 슈발만의 말에 루코는 뻗었던 팔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에 남겨두고 온 이실리아와 크로모도, 그리고 소마가 생각났다. 이런! 미미를 메리트네 집에 맡겨둔 게 다행이었다. 세 사람만 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펠리언을 도와 아파트 단지의 뒤로 쳐들어오려던 부대를 충분히 제압했다고 생각하고 나서야 소마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 종료가 된 것이 아니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아파트 정문 쪽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저건...?!"

그러자 아파트 단지의 정문 쪽 하늘에 이상한 게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엄청나게 커다란 구형의 물건이었다.

"엘핀도스 대장님! 적군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부하의 말에 엘핀도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 들고 상대의 상황을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정말로 적군이 재빠르게 뒤로 빠지고 있었다.

"전군, 진격을 멈추세요!"

이건 항복하겠다고 물러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뭔가 있었다. 하지만 적군의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화이어 필드나 진동파를 깔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 설마?!"

엘핀도스의 뇌리에 아까부터 신경쓰였던 단어 하나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폭탄.'

"대장님, 위에 - !"

위라고? 엘핀도스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위로 향하자, 하늘에서 커다란 구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엘핀도스에게는 보였다. 그것은 마력이 엄청난 양으로 징집되어 있는 것이었다. 말 그래도 마력 '폭탄'이었다 -

"엎드리세요!!!"

다급하게 소리치는 엘핀도스. 저게 땅에 닿아 터지면 끝장이다. 뭉쳐있던 마력이 그 자리에서 폭발하면 그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소마도 마찬가지였기에, 재빨리 전격을 날려 그 폭탄을 맞췄다. 그러자 아파트의 옥상보다 조금 아래의 높이까지 다다랐던 구가 곧바로 터져버렸다.

'쾅'
"크앗?!!"

폭탄이 터지면서 방출된 마력의 힘이 센 탓에, 멀리서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파동은 소마를 그 많은 퀸시의 화분들과 함께 옥상 한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윽 - "

옥상에 쳐져있던 철조망에 부딪혀 건물 아래로 추락하는 것은 면했지만, 대신 깨진 화분의 파편들을 온몸에 받은 소마는 힘이 완전히 빠진 채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그러고도 가까스로 눈을 뜬 소마의 시야에 잡힌 것은, 아까와는 반대쪽으로부터 날아오는 좀 더 거대한 마력 덩어리였다. 하지만 미처 손을 써 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소마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들었어? 들었냐고?"

쾅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루코가 버르작댄다. 아엘로트의 오토바이는 1동이 있던 자리와 2동의 사이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서문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이런......."

브레이크를 밟으며 아엘로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아파트 단지의 현재 상황은 처참했다. 방금 터진 폭탄 때문에 아파트 단지 중앙에 있던 막사들은 물론 놀이터나 주차장까지 엉망이 되어 있었고, 땅이 아닌 하늘 높이에서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터져나온 마력의 파동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그들을 치료하러 뛰어다니는 사람들, 망가진 배리어를 고치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 등등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5년 전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아엘로트는 겨우 억눌렀다. 지금은 과거에 대한 후회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이들을 도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야 했다.

"이실리아씨!"

그 와중에서 보라색 포니테일을 알아본 슈발만은 오토바이에서 뛰어 내려 이실리아에게로 뛰어 갔다.

"...슈발만씨?"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실리아가 슈발만을 발견하고 반색을 한다. 그 동안 아무 것도 못 하고 구호 물품을 옮기는 잡일을 하고 있던 이실리아는 갑작스레 막사를 덮친 파동 때문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막사에서 빠져나와 방황하던 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무사하댄다. 다행이다. 슈발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피해!!!"

주위 상황이 심상치 않다. 사람들이 고함을 치며 이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뭐지? 슈발만은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이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고 -

"루코씨, 피해요!"

역시 위험하다는 생각에 아엘로트는 급한 대로 루코라도 끌어안고 땅바닥으로 다이브했다. 그러자마자.

'쾅'

두 번째 폭탄이 지면에서 터져 버렸다.




"..푸압!"

호흡을 오래 참았다가 수면 위로 고개를 쳐 드는 사람마냥 루코가 옆으로 고개를 뺐다. 무언가 강력한 힘이 덮쳐오길래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땅에 엎어져 있었는데, 이제서야 압박하던 그 무언가가 가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 뭐하는 거야?!?!"

자기 위에 다른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화들짝 놀라 치한이야! 라는 식으로 아엘로트를 옆으로 밀쳐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물론 응큼한 생각으로 덮친 건 당연히 아닌 걸 알았지만 괜히 민망해져서 아엘로트를 한껏 째려보는 루코. 그런 루코에게 아엘로트는 난처한 듯 하하하 웃고는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큿 - "
"뭐야, 왜 그래?"

아엘로트가 일어나려다 말고 팍 주저앉길래 속이 덜컥하고 뒤집힌 루코는, 그제서야 아엘로트의 왼발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 왜 그래? 잠깐, 가만히 있어 봐,"
"아뇨, 괜찮 - "
"괜찮긴 뭐가 괜찮아?!!"

루코가 젖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서 아엘로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더 말하면 앞에 있는 아가씨가 울어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다. 씩씩대며 아엘로트의 발목을 살펴보는 루코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살면서여자 울리는 일은 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루코가 발목의 이곳저곳을 누르는 데서 생기는 통증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아엘로트는 묵묵히 견뎠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늘로부터 벌받고 있는 거라고 치자면서.
아차, 그러고보니 슈발만씨는?

"움직이지 마!"

아엘로트가 아파트 단지 안쪽을 보려고 몸을 틀자 루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말이지 도움이 안 돼, 라며 얼굴 들고 아엘로트를 보려는데 이 남자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있다. 무슨 일이지, 불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루코도 아엘로트가 보는 방향을 바라봤다.

"...!!!!!!!!"

이실리아가, 자신의 앞에 쓰려져 있는 슈발만을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슈발만씨? 슈발만씨!"

자신 대신 마력의 폭발을 받아냈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자기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로 이실리아는 그저 슈발만의 이름만 애타게 부르며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은 돌보지 않고 나같은 걸 지켜준 건가요, 어째서 신은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을 데려 간 건가요, 어째서 - 

"어째서!!!"


그 외침이 자신의 능력을 트리거시킨 것을 이실리아가 알아차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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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오랜만에 써서 큰일났어요. 저조차도 전편까지의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했어요 ㅠㅠ
연재 속도가 이 모양이라 죄송합니다ㅠㅠ 벌써 1년이 넘었다니!
이제는 이 사람들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 그런데 오토바이는 브레이크...밟는 거 맞나요? 저도 운전 면허가 없어요. 루코야 같이 따자.

* 네 맞아요. 사실 발만이실보단 루코아엘이 좋아서 끝부분이 미묘하고 소마루코보단 아엘루코가 좋아서 아엘이 부상당한 게 들어갔어요<<<<
원래 소마루코로 보이던 그 라인이 세월이 지나니 아엘루코로...그런데 게임 본편에서도 좀 그런 식이지 않던가요?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음음. ........잡담입니다.

* 타공카에 올리던 소설인데 다시 오랜만에 올리기 참 민망하네요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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