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30)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30)

Posted at 2011. 1. 30. 17:17 | Posted in 소설/레나르트아파트에어서오세요

오오 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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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병원 침대가 아닌 자기 집의 이불 위에서 잠을 잤던 슈발만은, 아침에 일어나가 침대의 시트에 익숙해져 버렸던 몸이 찌뿌둥하게 굳어있는 느낌에 힘겹게 기지개를 켰다.

때는 7시 반. 병원에서는 아침 식사를 일찍 줬기 때문에 집에 와서도 이 시간에 일어난 모양이다. 오늘부터 다시 핀더스 카페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 아엘로트가 말렸지만 열흘이나 자리를 비웠던 터라 고집을 부렸다 - 여유롭게 카페에 나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카페의 오픈 시각은 9시. 오늘은 오랜만에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가 볼까 해서, 슈발만은 한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리고 현관에 나와 보니, 어레, 분홍 머리 소녀가 저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는 핑코였다. 그런데 터덜터덜 걷는 폼이 조금 이상하다.

"핑코,"
"발만씨, 왠 일이야? 오오, 기합도 팍팍 들어갔네? 무슨 좋은 일 있어?"
"글쎄, 딱히 기합이 들어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말하며 핑코의 표정을 살피다가, 슈발만이 물었다. "그런데 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정말 있던 모양인지 핑코가 시무룩해졌다. 아침부터 시무룩한 모습은 핑코에게 영 안 어울린다.

"무슨 일이야?"
"그게, 발만씨, 있잖아 - 아, 가면서 이야기하자. 좀 길어."

그로부터 핑코가 해 준 이야기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무려 자신의 먼 친척으로부터 어제 국제 전화가 걸려왔었더라 - 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핑코가 로봇 경진 대회에 나갔다가 3등을 했다는 기사를 우연히 접하고, 사진이나 기사 내용으로 미루어보니 이 핑코가 레나르트 아파트에 산다던 자신의 먼 조카 핑코가 맞다고 생각해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그거 기뻐해야 할 일 아니야?"
"그런데 그 아저씨가 말이야, 우리 친가 쪽 친척 어른인데 난 누군지도 잘 모르겠고, 그리고 있지 외국에 사시는 분이래."
"교포시구나."
"그래서 나보고 자기랑 같이 살자고."
"…응?!"

슈발만이 놀라서 핑코를 보자, 핑코는 완전히 암울 그 자체였다.

"여기가 위험하다고 기사가 떴으니까 더 이상 거기 살면 안 되겠다, 안전하게 이쪽으로 와라, 어차피 지금 혼자 살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자기가 무슨 대학 교수랑 안면이 있는지 뭔지 여기 오면 로봇공학 교수로부터 영재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느니 뭐라느니…."
"잘 됐네, 핑코!"

슈발만의 말에 핑코가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슈발만의 목소리에 진심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영재 교육이라잖아. 넌 전국 대회에서 3등할 정도인데 그 실력을 가만히 썩히는 건 내가 봐도 너무 아깝다. 그러니까 외국에서 교수한테 배우면 - "
"난 가기 싫단 말야!!!"

핑코가 버럭 소리지르고 나자 주위가 고요해졌다. 슈발만은 상대방의 의외스러운 반응에 어쩔 줄을 모른 채, 학교로 뛰어가 버리는 핑코의 뒷모습만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가 버리더라고."

그래서 슈발만은 카페에 와서 아르바이트 동지님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슈발만씨, 핑코씨가 왜 가기 싫다고 하셨을까요?"
"그거야…. 여기를 떠나기 싫어서?"
"잘 아시면서 그러셨네요."
"그래도," 슈발만은 억울하다는 심정이었다. "당장 살던 곳을 떠나는 거야 누구라도 싫겠지만 국내도 아니고 외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잖아. 게다가 핑코는 아직 어리니까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더 좋은 기회지."

그 점에 대해서는 아엘로트도 동의했다. 거기에 슈발만이 보기보다 생각이 깊다는 새삼스러운 코멘트도 플러스.

"아직 엄마를 못 찾아서 그런가."
"아……."

그랬다. 핑코는 엄마를 찾고 있었다. 핑코의 어머니는 레나르트 아파트에서 실종되었다. 그것도 충분히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글쎄요. 물론 제일 중요한 건 핑코씨의 생각이겠지만, 제가 보기에도 친척 분이 제시한 조건이 흔치 않게 좋은 조건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찾으면 되는 걸까?"

핑코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 모녀의 극적인 상봉 -> 어머니의 외국 유학 추천 -> 핑코가 영재 교육을 받음, 이라는 루트가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겠으나,

"그게 말처럼 쉽다면 좋겠습니다만, 5년 전 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정보는 공개된 것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렇겠지."
"그래도 할 수 있는 한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글쎄요,"

아엘로트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예를 들어 자료 활용이라든가?"




그날 저녁, 카페 문을 닫은 후 집으로 돌아온 아엘로트는 예전에 슈발만에게 빌려준 적이 있는 넷북의 전원을 켰다. 슈발만의 입원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다과회는 레나르트 아파트의 재건(?)이 끝날 때까지 재개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잘 때까지는 여유가 많았다.

"생각보다 많군."

저번에 국가 정보원에 무단 잠입했을 때 루코가 가져다 준 USB에는 올해의 두 번째 타르타로스 사건에 관한 자료들이 이것저것 많았다. 그 때는 정말 운이 좋았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윈도우 탐색기의 스크롤을 내려 보니, 아쉽게도 5년 전 사건에 관한 자료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웹하드를 이용해 전송받았던 파일들이다. 자신이 직접 골라서 보냈던 파일들로, 그 중에는 5년 전 사건에 관한 자료들도 있었다. 파일명들이 뒤죽박죽이라 어떤 자료들인지는 아엘로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

있다. 아무거나 쭉 열어보다가 어느 파일에 사망자/실종자 명단이 있었다. 보고서의 작성자 이름과 부서를 보니 국가 정보원 사람은 아니고 어디 경찰 쪽 사람인 것 같았다. 피해자의 이름과 함께 신상 정보, 당시 피해 상황 등이 쭉 기록되어 있었다. 원래 피해자의 수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 사실을 눈으로 보는 것은 그냥 아는 것과는 달랐다. 아엘로트는 한참 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굳어 있다가, 시계의 분침이 열두번째 눈금에서 딸깍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얼른 둘러보자. 어차피 이런 걸 보려고 자신도 자료를 저장해 뒀던 거다.

슈발만에게서 핑코의 어머니의 이름 등을 들은 적은 있다. 그 이름 하나를 머릿속에 두고 보고서의 스크롤을 빠르게 내렸다. 그런데.

"없어?"

실종자 명단에 그 이름이 없다. 설마해서 다시 천천히 읽어 봤는데, 비슷한 발음의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다. 분홍색 머리 등의 외형상 특징이 비슷한 사람조차도 없다.

"…설마……."

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인해 볼 수밖에. 아엘로트는 사망자 명단으로 눈을 돌렸다.




다음 날, 핀더스 카페에 온 슈발만이 아엘로트로부터 들은 첫 번째 말은 질문이었다:

"슈발만씨, 핑코씨의 어머님 성함이 '레나리'씨가 맞나요?"
"아, 어, 그럴걸…. 왜 그래?"
"정말입니까…?"

아엘로트가 평소와는 딴판으로 웃음기가 전혀 없길래 슈발만은 불안해졌다. 설마 이 녀석, 무언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해주려고 하는 건가?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자신의 직감은 이상하리만치 잘 들어맞았다.

"슈발만씨, 그 이름은 사망자 명단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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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끊어야 적절할 것 같아서..여기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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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29)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29)

Posted at 2011. 1. 26. 22:34 | Posted in 소설/레나르트아파트에어서오세요

삘 받았을 때 얼른 써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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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자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발만씨!!!"

핑코가 신경질적으로 솜이불을 홱 걷어 냈다.

"으악!!!!!!!!!!!!!!!!!"

그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슈발만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하여간 늦잠 자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겨가지고....... 일어나!"
"에? 핑코? 여긴 왠 일이야?"
"오늘 퇴원 날이잖아!"




슈발만의 퇴원 절차는 간단했다. 짐 정리를 하고 점심 시간 전에 병실을 나와서 퇴원 수속을 밟으면 끝. 병원에 가 본 적은 있어도 큰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은 없는 핑코는 그 모든 과정을 신기하게 여겼다.

"발만씨 좋았겠다? 이실리아 언니가 매일마다 옆에 있어줘서."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핑코가 한 말에 슈발만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발만씨 낚였다~. 핑코는 깔깔 웃었다.

"그치? 발만씨가 헤벌쭉하는 게 안 봐도 비디오라니까? 언니 고생 많았어, 훌쩍."
"괜찮아, 핑코. 좋았으니까."
"...네?"

언니? 뭐라구요? 핑코가 식겁하고 이실리아를 올려다보는데, 세상에, 두 사람 지금 서로 빤히 쳐다보면서 뭐하는 거야? 이거 이거 이거, 아침부터 애정 행각이라도 하려는 거?!

"발만씨!"

핑코는 애꿎은 슈발만의 옷자락을 세게 당기고 택시 정류장으로 끌고 갔다. 내가 없는 사이에 이실리아 언니를 낚은 거야? 감히 내 허락도 없이? 그렇게 씩씩대는 핑코와 그런 핑코에 끌려가는 슈발만을 바라보며 이실리아는 후후훗 웃다가, 곧 짐을 가득 담은 쇼핑백들을 들고 두 사람을 따라 갔다.




택시를 타고 세 사람이 내린 곳은 핀더스 카페 앞이었다. 카페 문을 여니 '땡그랑' 하고 문에 달려있던 종소리가 울린다. 이 소리 못 들은지도 벌써 며칠이나 됐군, 하고 슈발만은 새삼스레 감상적이 되었다.

"어서오세요 - 아, 슈발만씨!"

낯익은 목소리다. 카페 전용 앞치마를 두르고 카운터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아엘로트였다. "핑코씨와 이실리아씨도 오셨군요."

"깜장 오빠, 발만씨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지? 내가 대신 사과할게."
"하하, 뭘요,"

아까부터 자신을 까려고 작정한 핑코다. 슈발만은 한숨을 쉬었지만, 아엘로트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자신이 입원해 있을 동안 혼자서 두 사람의 몫을 해 냈을 터였다.

"뭐라도 드릴까요?"
"아냐, 아엘로트. 이제 가서 짐 정리 해야지. 하고 바로 올게."

그러자 아엘로트는 무슨 소리냐며 팔짱을 꼈다. "막 병원에서 나오신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몸 관리 안 하시면 뒤에 계시는 이실리아씨께서 섭섭해 하십니다?"
"으악, 너까지 - "

슈발만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걸 보고 웃는 아엘로트. 옆의 핑코까지 웃는 걸 보고 있으려니, 병원에 오기 전에 핑코가 아엘로트하고 자신을 곯리려고 뭐라도 짠 건 아닌가 정말로 의심이 되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걱정 끼쳐서 미안."

그 말에 아엘로트는 고개를 젓고, 이실리아 쪽으로 턱짓을 했다. 하긴, 아엘로트에게 생존 신고도 했으니 이제 가 볼까.

의식이 없던 슈발만을 병원까지 옮긴 게 아엘로트였다고 나중에 이실리아가 병실에서 말해 주었다. 이실리아 자신은 물론이고 아엘로트가 데리고 있던 루코도 정신이 없었다고. 그 후에도 먹을 거리를 (사장 몰래) 싸 준다든지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카페에 들렀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고맙다고는 못 했지만, 뭐, 알고 있겠지.

카페에서 나와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레나르트 아파트의 정문이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정문쪽의 담벽 같은 구조물들이 많이 부서져 있었다.

"여기는 아직 안 고쳤네?"

핑코가 그러면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저~쪽에 있는 놀이터는 어느 정도 손 본 것 같은데."

예전에 크로모도와 알퐁스와 함께 와플을 나눠 먹었던 그 놀이터. 다같이 모래 싸움도 한 바탕 했었다. 그 때 발만씨는 안 한 것 같았지만. 쳇, 지금 생각해보니 슈발만도 모로 선생처럼 모래판에 끌고 와서 다굴을 했어야 했다. 핑코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 뒤돌아, "발만씨 언니 보느라 뒤쳐지지 말고 빨리 오라고!" 하며 양팔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따금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엘핀도스인가 하는 사람의 부하들이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도와 보수 공사에 힘을 쓰고 있다고 해서, 감사의 표시로 인사라도 하는 것이었다.




레나르트 아파트에서의 '전쟁' 으로부터 열흘 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겪지도 않을 일을 하루이틀 안에 몽땅 겪어버린 아파트 사람들의 후유증은 다행히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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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저게 뭐야?"

루코가 가리키는 곳은 아까까지만 해도 슈발만과 이실리아가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주위가 눈부셔서 두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곳에서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하게 뿜어져나오는 녹색 빛에 루코와 아엘로트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곧 어쩐지 따뜻한 기분이 들더라는 거였다. 그 따스함이 가시고 나서야 두 사람은 다시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으...뭐였지?"

루코는 아직도 눈이 시린지 손을 눈꺼풀에 대고 문질렀다. 그러다가.

"어..?"
"왜 그러시나요?"
"잠깐, 당신, 잠깐만 있어봐,"

그러고서 루코가 아엘로트의 발목을 꽉 눌렀다.

"어때?"
"...안 아픈데요?"

아엘로트는 루코가 누른 부위를 보고 어안이벙벙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붉게 부어올라서 루코가 누를 때마다 아팠던 왼쪽 발목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멀쩡했다. 그렇다면 일어설 수 있을까, 해서 땅을 짚고 일어서니 정말이다. 통증같은 것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그거, 마법 아니었을까?"

방금 전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루코의 눈이 지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법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아가씨였지. 루코의 말대로 그 빛이 마법이라고 한다면 그 마법은 상처를 회복하는 종류의 마법이었을테고 그 근원지는 슈발만과 이실리아가 있던 곳이었고 그렇다면 -

"슈발만씨!"

쓰러져 있던 슈발만의 모습이 생각나서 아엘로트는 이실리아 쪽으로 달려갔다. 루코도 퍼뜩 슈발만을 기억해 내고 뒤따라 가 보니, 이게 뭔 일이래, 좀전과는 달리 슈발만은 이실리아 앞에서 대놓고 자고 있었다. 쿨쿨, 아주 편안한 얼굴로. 아엘로트도 혹시나 해서 슈발만의 목에 손가락을 대보니 이 사람, 살아 있다. 다행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땅바닥에 털썩 앉아보니 이실리아가 멍하니 슈발만을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실리아씨? 괜찮으십니까?"
"......."

혼이 빠져나간 듯 가만히 있는 게 자기 자신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나 모르는 모양이다. 아엘로트는 어쩔 수 없군, 이라고 짧게 중얼거리고는 슈발만을 등 위로 끌어올려 부축했다.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서 두 사람 다 검사라도 받게 해 봐야지.

병원 검사 결과 이실리아는 괜찮았지만 마력 폭탄의 충격으로부터 이실리아를 감싸줬던 슈발만에게는 내상이 남아있어서 슈발만만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되었고, 그 후에 아엘로트는 엘핀도스로부터 이실리아가 드디어 치유술을 발동했었던 것 같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아엘로트와 루코가 봤던 그 녹빛이 아파트 단지 전체에 퍼질 정도로 강한 마법이었다는 듯 했다. 다만 그 대신 위력은 약했는지 완벽한 치유까지는 못 되고 그래도 치명상을 입은 사람은 없게 해 준 정도로 끝났던 모양이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이실리아씨는 치유술의 대가라고 했잖아?"

펠리언도 그렇게 말하더라. 펠리언이 정말 '대가'라는 칭호를 붙여줬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예측하지 못했던 이실리아의 치유술 덕에 아군은 물론 정부군까지 그 효과를 받아버려서, 본의 아니게 마법의 도움을 받게된 그들이 주춤할 사이 엘핀도스군에서 몰아붙였다고 한다. 그렇게 금요일의 전쟁 1일차는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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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에 도착해서 문을 따고 들어가니 공기가 탁했다. 슈발만은 당장 신발을 벗어 던지고 안에 뛰어 들어가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을 밀어 젖히는 것부터 했다. 그러자 서늘한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신문 엄청 쌓였네. 발만씨가 신문을 읽을 줄은 몰랐어."

핑코는 현관문 옆에 놓인 신문지 뭉치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오호라, 이것 봐 발만씨, 내가 말했지? 난 취재도 받은 몸이라고!"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먼지를 휘휘 젓던 슈발만이 핑코의 말을 듣고 신문지를 건네받았다. 신문의 4면 즈음에 기사가 있었다. 핑코의 흑백 사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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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의 다음 날이었던 토요일, 엘핀도스군 쪽에서는 상대방의 기세라면 이틀째라도 충분히 공격해올 수 있다고 판단해서 밤새 대비를 했지만, 상대방은 낮에는 공격을 해 오지 않았다. 낮에 불꽃 팡팡 튀기다가 일반인의 눈에 띄면 곤란할 수 있기에 그런 것이리라고 생각한 엘핀도스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날 밤의 공격이 마지막이 되어 버렸을 줄이야.

"대장님, 이것 보세요 - 우와악!!!!"

점심 식사 후, 루엔트가 무언가를 팔에 안고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오다가 천에 걸려 넘어졌다. 전날 파괴된 막사 대신 급헤 세워진 임시 막사는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구를 미처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천막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루엔트?"
"아, 예, 그게, 대장님, 이것 보세요,"

엘핀도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루엔트가 내민 것은 노트북의 화면이었다. 거기에는 인터넷 신문 기사의 웹페이지가 떠 있었다. 엘핀도스는 엎어진 루엔트의 손으로부터 노트북을 넘겨 받고 손가락으로 터치패드를 쭉 긁어 스크롤을 내려보았다.

"...델리오 초중고등학교 인근 아파트 단지에서....이게 뭡니까?"

엘핀도스가 큰 눈으로 묻자 루엔트가 헤헤 웃었다.

"그게, 그 분홍 머리 여자 아이 있잖아요. 그 아이가 말했나 봐요. 지금 여기 큰일났다고."

과연 그랬다. 토요일 아침, 로봇 경진 대회에 나갔던 핑코의 인터뷰가 인용된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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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에 열렸던 로봇 경진 대회는 그 결과를 대회 직후에 발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오전에 있었던 초등부 대회의 결과는 12시 즈음에 발표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핑코의 성적은 3등. 아직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가 독학만으로 상위권의 성적을 거둔 것은 이례적인 일로, 실제로 1등과 2등을 한 학생이 모두 6학년이었기에 핑코는 1, 2위 학생들보다 더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주목을 받은 자리에서 핑코는.

'사실은,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수상 소감을 시작해 버린 것이었다.

보통 같으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말로 채워져야 했을 수상 소감이 소감이 아니고 왠 전쟁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자 대회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싸늘해져 버렸다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 중 누군가는 핑코의 이야기를 가볍게만 듣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핑코의 인터뷰가 인터넷 기사로나마 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지금은 없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기자 몇 명이 왔다 갔었어."

기사 거리가 되기는 되고 있는 모양이다. 정작 지상파 방송이나 주요 신문들에는 소개되지 못한 듯 하지만, 5년 전에 비하면 인터넷으로나마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굉장한 발전이다. 이실리아의 말로는 어떤 시민 운동 단체가 다녀갔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기사가 나온 덕분인지 금요일 밤 이후로 레나르트 아파트 단지는 위협받지 않고 있다. 그래서 엘핀도스군은 이제 아파트 단지의 보수 등을 돕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 일이 알려졌는데, 더 이상 저번처럼 공격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론의 힘이란 이런 걸까, 슈발만은 기사를 다 읽은 후 신문을 돌돌 말았다. 이 날짜 것은 기념으로 갖고 있어야겠다.

"대단하네."
"이제 알았어?"

씨익 웃는 핑코가 새삼스레 대견스러워 보여서, 슈발만은 핑코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줬다.

"아웃, 왜 그래 발만씨,"

쑥스러운지 핑코가 홱 자리를 피하고 한창 짐 정리 중인 이실리아의 뒤로 가 숨는다. 그런 핑코를 보며 이실리아는 사람 좋게 미소만 지었다.




병원에 들고 갔다 다시 가지고 온 짐을 제 자리에 정리한 후에 슈발만 일행은 소마와 루코, 그래니트를 보러 갔다. 희한하게도 셋은 아파트 옥상에 있다고 했다.

"에? 매일마다 옥상에서 크로모도씨랑 누굴 도와 준다고?"
"퀸시. 나보다 키가 작은 정령이야!"
"아무리 인간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너보다 작을 수가 있냐 - "

슈발만의 말에 핑코는 발로 슈발만의 다리를 걷어 찼다. 윽, 아프다! 어금니 꽉 깨물어서 신음 소리 뱉는 것만은 면했다. 아무래도 이실리아의 앞에서 끙끙대기는 창피하다. 안 그래도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도 보여줬는데 더 망가지면 쓰나.

핑코가 옥상으로 향하는 철문을 열고 그 너머로 뛰어들자,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서 슈발만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곧 시야에 옥상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그마한 화분들이 옥상의 테두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잠깐! 그 크로미는 저기 구석에 놓아야 돼, 거기가 아니고!"

하이톤의 여자 아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게 그 '퀸시'라는 사람 - 아니 정령의 목소리인가 보다.

"네, 죄송해요오 - "

풋, 이건 소마 목소리다. 오랜만에 듣는데 당황스러움에 잠긴 목소리라 슈발만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옥상으로 들어오는 슈발만과 이실리아를 발견한 루코가 팔을 크게 흔들어 두 사람을 반겼다.

"슈발만씨다! 이제 괜찮은 거야?"
"원래부터 괜찮았는데 퇴원이 늦은 거야,"
"사람 걱정시키지 좀 말라니까."

슈발만이 루코가 툴툴대는 걸 보니, 어쩌면 핑코가 툴툴대는 건 루코의 영향이 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발만씨! 슈발만씨가 오셨어요!"

소마처럼 화분을 진열하던 그래니트도 그 나시프인지 뭔지 하는 털로 만든 귀를 팔락이며 옥상 출입구 쪽으로 통통 뛰어 왔다. 루코와 세트로 끼고 있는 그 머리띠도 다시 보니 반가웠다. 대관절 뭘 위해 끼는 머리띠인지 슈발만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 왔나."

퀸시가 소마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 쪽에는 크로모도가 서 있었다. 그 '알퐁스'라는 강아지처럼 생긴 동물을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끄덕. 살아있으니 됐다, 라는 식이다. 음, 이 사람과 친해지려면 아직 멀었으려나. 그래도 조급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인간 관계라는 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슈발만씨, 저기 보세요."

이실리아의 말에 슈발만이 뒤돌아보았다. 그러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쓰윽 옥상을 훑고 지나갔다. 옥상에 모인 그들의 머리 위로, 경비행기 한 대가 뒤에 흰 구름을 만들며 날아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이 들어서, 슈발만은 두 팔을 넓게 벌려 가슴을 쭉 폈다.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발만씨와 함께 옥상에서 잡일을 했다. 퀸시가 소마 오빠와 발만씨와 모로 선생에게만 궃은 일을 시켜서 나랑 루코 언니랑 그래니트 언니는 편했다. 이실리아 언니는 내내 미안해 하는 것 같았다. 음음. 도대체 발만씨는 언니를 어떻게 낚은 걸까. 아우, 생각만 해도 빡치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 "
"...진정......."
"휴우. 알았어 탱이. 널 봐서라도 진정해 주도록 할게."

한숨을 쉬고 핑코는 한창 끄적이던 일기장을 탁 덮었다. 그리고서는 거실 바닥에 누워 늘어졌다. TV에서는 저녁 9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봇 경진 대회에 나간지 열흘이 되어가려고 한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있을 엄마를 찾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나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를 찾고 싶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그냥, 뭐...결국 아파트에도 좋은 일이 되었으니까 뿌듯하다는 느낌? 그게 커서 이걸로는 엄마를 못 찾는다고 해도 뭐..아쉬울 거 같지는 않다, 이 말이지."

탱이에게 그리 말하자 탱이가 느릿하게 끄덕였다.

"자, 그럼 다음 대회 일정도 알아 보고, 이것저것 해 봐야지!"

핑코가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엄마를 찾는 일은 목표 달성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실리아도 - 운이 엄청나게 좋은 경우인 것 같기는 하지만 - 기억을 되찾았다. 자신도 어떻게든 노력하다 보면 - ! 그러니까, 이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을 또 찾아야지. 그래서 루코네 집에 가 인터넷이라도 빌릴까 하는 중에,

'따르르르르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


* 헉..헉...헉.....

한일전 하는 동안 다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오늘 밤까지 질질 끌었네요...

이번 편은 유난히 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원래 이번 편은 핑코와 그래닛의 에피소드였지만, 조금 방향을 바꿨어요. 솔직히 네 그래요, 대회장을 묘사하기가 귀찮았어요.

밑에 비행기와 관련된 미연시를 켜 놓은 데서 착안해 경비행기를 잠깐 등장시킨 건 안 자랑<-?!
어울리는 bgm이라도 깔고 싶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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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28)레나르트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28)

Posted at 2011. 1. 23. 19:55 | Posted in 소설/레나르트아파트에어서오세요

정말로 오랜만에 재개입니다. 이게 몇 달만이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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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과 엘핀도스의 부대 간의 전투로 인해,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요란한 공격 소리가 가득 채워진 아파트 단지. 그 아수라장에서크로모도는 정신없이 그의 애완 동물을 따라 달리던 중이었다. 이때까지 자신과 함께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알퐁스가 돌연 어떤 확신이 들었는지 자신의 옷자락을 물고 끌었기에, 크로모도는 알퐁스를 믿고 뒤따르고 있었다.

"퀸시?!"
"아, 크로모도,"

그리고 다행히도, 알퐁스의 후각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았다. 퀸시는 아파트 2동의 입구 앞에서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게다가 멀쩡하고. 게다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긴급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고 -

"'아, 크로모도,' 라니 너 뭐가 잘나서 그렇게 태평해?!!!"

 그런 퀸시에게 크로모도는 그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실은 무사해서 신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야 할 것을, 너무나도 허탈해서 속에 쌓였던 것이 폭발해 버렸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퀸시도 화를 낸다.

"넌 다른 사람들 도와줘야 될 걸 왜 여기에 와서 이 난리야?!"

퀸시의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

"왈왈!!!!!"

알퐁스가 갑작스럽게 짖어대자 크로모도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알퐁스가 손을 흔들어대는 방향을 보았다. 밤하늘에 흐릿한 무언가가 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 ?!

"위험해!"

순간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크로모도는 냅다 퀸시를 끌어안고 땅으로 엎어졌다. 미사일이다, 적어도 그런 물건이다, 맞으면 끝장이다!

'쾅'
'파지직'
"..음?!"

지면에 도달하기도 전에 터져버린 그 물건과 예측하지 못했던 스파크 튀는 소리에 크로모도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크로모도씨, 괜찮으세요?"
"..너는......."

앞에는 푸른 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오른손 위에 얹혀져 있는 원반 같은 것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파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소마라고 했던가, 이 소환수는 2동 주변이 자기가 맡아 지키기로 한 구역이었지. 그러니 자신들을 구해준 건 이 녀석일 터였다. 그 미사일이란 것은 두 동강이 난 채 저 멀리 땅에 처박혀져 있었다. 그 미사일을 보자 크로모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제는 아예 하늘에서 저런 걸 떨어뜨리는 거냐.

"너무해, 저런 것까지......."

5년 전에는 저런 걸 마구잡이로 떨어뜨렸어. 이 정도면 양반이다. 그렇게 말해주는 대신 크로모도는 퀸시를 일으켜 세워 주고는 소마를 불렀다. 퀸시가 무사한 것도 확인했으니 자신은 또 자신의 일을 하러 가야 했다.

"미안하지만, 이 녀석 좀 내 집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겠나?"
"예,"
"부탁한다,"

잘은 모르지만 왠지 믿음이 가는 소년이다. 크로모도는 소마에게 퀸시를 맡기고는 알퐁스를 데리고 엘핀도스의 막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크로모도의 뒷모습을 쭉 지켜보려던 퀸시를 소마는 얼른 데리고 2동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크로모도의 집은 아파트의 꼭대기층에 있었다. 구식 엘레베이터는 느릿하게 한 층 한 층을 기어올라가는 듯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퀸시가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든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안심시키고 보자는 식으로 대답한 소마는,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능력이 완전하게 발휘되지 않는 몸이라 자신은 2동과 3동 - 미르는 3동에서 대피한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 건물의 범위만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전세는 영 좋게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방금 전의 미사일을 빼 놓고서라도, 특공대를 실은 헬기니 뭐니를 동원해서 공중에서 공격을 하지를 않나, 전면전으로 전경들을 몰아붙이지 않나. 그나마 엘핀도스 군의 마법사들이 어떻게 해 보고는 있는 모양이고 정부군의 공격을 대비해 배리어도 미리 쳐 뒀지만 소마가 보기에 이 싸움은 수적으로도 화력 상으로도 불리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전력이 되질 못하고 있었다. 명색이 이 곳을 지키기 위해 소환된 소환수인데.

"아, 도착했다."

퀸시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래, 여기는 꼭대기 층이었지.

"퀸시씨," 소마가 퀸시를 따라 내리며 물었다.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나요?"

"물론...저 계단을 올라가면 되긴 하는데. 왜?"
"위에서도 상황을 봐 두고 싶어서요. 계속 밑에서만 있느라."
"그렇구나." 퀸시는 얇은 귀를 파닥였다. "행운을 빌어."

감사합니다. 소마는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답한 후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나도 나중에 오토바이 면허 따 볼까 봐."
"그런데 면허 따는 거, 말만큼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흥, 그러셔?"

불안감을 잊으려는 듯 괜히 계속해서 말을 꺼내는 루코와, 그걸 알고 일부러 장단을 맞춰주는 아엘로트, 그리고 두 사람의 뒤에서 말없이 무게중심을 받쳐주고 있는 슈발만 세 사람은 오토바이 한 대를 나눠타고 레나르트 아파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 도로의 통행량이 적어진 덕분에 오토바이를 세 사람이 같이 타고 있다고 태클을 받는다거나 사고가 날 위험은 적은 것이 그나마의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중에 카페 가면 와플 공짜로라도 하나 줘, 솔직히 아까 그 파일들 내가 찾은 거잖아?"
"USB는 슈발만씨께서 찾으셨잖습니까."
"아, 뭐, 어쨌든! 나 단 거 땡겨. 오랜만에 먹고 싶다구. 와플 안 먹은지 오래 됐어."

오래 되었다. 최근 들어 5일간,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준비를 하느라 모두들 암묵적으로 야밤의 다과회는 쉬자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모두 모여 함께 먹고 수다 떨고, 매일마다 해 왔던 그 일상이 지금은 어찌나 그리운지.

"오래 됐군요."

아엘로트도 루코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짧게 말하고는, 핸들을 꽉 쥐었다.

"오래 됐지."

한숨과 함께 슈발만도 한 마디 내뱉었다. 부디 오늘만 지나면 어떻게든 끝나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었지만, 제발 어떻게든 빨리 끝났으면.




철문을 열고 옥상에 들어서니, 아파트 단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소마는 옥상 바닥에 줄지어 서 있는 화분들을 발로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파트의 정문이 있는 방향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정문 쪽에서는 엘핀도스의 군대가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화이어필드의 불길 때문에 정부군 쪽에서 쉽사리 접근을 못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레나르트 아파트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은 최선의 방어 방법이지요.' 라며 몇 시간 전 작전 설명을 시작하던 엘핀도스가 떠올랐다.

"..어?!"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뒤로 돌린 소마의 눈이 단박에 커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파트 단지의 뒤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직감상 저 사람들은 절대 이쪽편이 아니었다. 정부군 쪽일 거다. 빠르게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눈으로 쫓아보니 아파트 단지의 후문 근처에 펠리언이 사람 몇을 데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저 수로는 역부족이다.

'어떻게 하지?'

자신이 지금 펠리언에게로 달려가 그쪽으로 적이 오고 있다고 알리기엔 엘레베이터가 너무 느리다. 그렇다면.
소마는 한 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 전기를 모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선제 공격을 해 주면 된다. 절대, 아파트 단지의 뒤로 쳐들어오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하앗!"

기합 소리와 함께, 소마는 모은 전기를 후문 방향으로 내리꽂았다. 갑자기 지상에 내려친 벼락은 적에게 타격을 입혔을 뿐만이 아니라, 떨어진 곳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펠리언의 주의를 끌어모으기도 했다.

"뭐야, 진짜로 이 쪽으로 쳐들어오려고 그랬네?"

엘핀도스가 슈발만이 건네준 정보를 믿고 자신을 이쪽으로 보냈을 때, 펠리언은 솔직히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오다가 뭐에 맞았는지 휘청거리고 있는 적군들을 보니 슈발만이란 사람이 보통 사람은 아닌가보다, 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나저나 뭐에 맞았길래 저렇게 파리해진 거지?

"어쨌든, 가자 얘들아! 이 때 쓸어버리자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급작스런 적의 방문에 놀란 부하들을 데리고, 펠리언은 적군들을 향해 진격했다. 라이트닝 월이 제대로 먹힌 것을 확인한 소마도 수가 적은 펠리언과 그 동료들을 위해 옥상에서 공격 보조를 했다. 앞에서는 사람이 달려들고 위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난리가 따로 없었다. 전기가 몇 번 튀는 것을 보고서야 펠리언은 위를 쳐다 보고, 푸른 빛의 전기를 모으는 소년을 어렴풋이 분간할 수 있었다. 보일지 어쩔 지는 몰라도 펠리언은 일단 엄지 손가락을 위를 향해 치켜 세워줬다. 요 며칠간 자기 임무에 대해 자신이 없던 꼬맹이였는데 이럴 때 칭찬해 줘야지.
그러느라 펠리언은, 아직 제압하지 못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무전기로 긴급 연락을 취하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레나르트 아파트 단지에 거의 다 왔다. 아엘로트가 "공격 루트는 아파트 단지의 뒤쪽으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한 쪽 방향보다는 여러 방향에서 공략하러 올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 낸 루트는 정면에서 맞붙을 때 뒤를 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죠." 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오토바이는 아파트 단지의 서문을 목표로 달리고 있었다. 앞도 뒤도 아니라면 옆이라는 논리였다.

"엇, 저것 봐! 불난 거 아니야?!"

갑자기 루코가 소리지르며 손가락을 뻗었다. 아파트 단지 쪽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따금 벼락이 내려치는 것도 보였다.

"마법사들이니까 불꽃 날리는 정도야 쉽게 하겠지."
"에?"
"일부러 불을 피운 걸 수도 있어."

아 참, 우리편에는 마법사들이 있었지. 슈발만의 말에 루코는 뻗었던 팔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에 남겨두고 온 이실리아와 크로모도, 그리고 소마가 생각났다. 이런! 미미를 메리트네 집에 맡겨둔 게 다행이었다. 세 사람만 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펠리언을 도와 아파트 단지의 뒤로 쳐들어오려던 부대를 충분히 제압했다고 생각하고 나서야 소마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 종료가 된 것이 아니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아파트 정문 쪽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저건...?!"

그러자 아파트 단지의 정문 쪽 하늘에 이상한 게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엄청나게 커다란 구형의 물건이었다.

"엘핀도스 대장님! 적군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부하의 말에 엘핀도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 들고 상대의 상황을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정말로 적군이 재빠르게 뒤로 빠지고 있었다.

"전군, 진격을 멈추세요!"

이건 항복하겠다고 물러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뭔가 있었다. 하지만 적군의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화이어 필드나 진동파를 깔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

" - 설마?!"

엘핀도스의 뇌리에 아까부터 신경쓰였던 단어 하나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폭탄.'

"대장님, 위에 - !"

위라고? 엘핀도스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위로 향하자, 하늘에서 커다란 구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엘핀도스에게는 보였다. 그것은 마력이 엄청난 양으로 징집되어 있는 것이었다. 말 그래도 마력 '폭탄'이었다 -

"엎드리세요!!!"

다급하게 소리치는 엘핀도스. 저게 땅에 닿아 터지면 끝장이다. 뭉쳐있던 마력이 그 자리에서 폭발하면 그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소마도 마찬가지였기에, 재빨리 전격을 날려 그 폭탄을 맞췄다. 그러자 아파트의 옥상보다 조금 아래의 높이까지 다다랐던 구가 곧바로 터져버렸다.

'쾅'
"크앗?!!"

폭탄이 터지면서 방출된 마력의 힘이 센 탓에, 멀리서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파동은 소마를 그 많은 퀸시의 화분들과 함께 옥상 한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윽 - "

옥상에 쳐져있던 철조망에 부딪혀 건물 아래로 추락하는 것은 면했지만, 대신 깨진 화분의 파편들을 온몸에 받은 소마는 힘이 완전히 빠진 채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그러고도 가까스로 눈을 뜬 소마의 시야에 잡힌 것은, 아까와는 반대쪽으로부터 날아오는 좀 더 거대한 마력 덩어리였다. 하지만 미처 손을 써 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소마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들었어? 들었냐고?"

쾅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루코가 버르작댄다. 아엘로트의 오토바이는 1동이 있던 자리와 2동의 사이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서문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이런......."

브레이크를 밟으며 아엘로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아파트 단지의 현재 상황은 처참했다. 방금 터진 폭탄 때문에 아파트 단지 중앙에 있던 막사들은 물론 놀이터나 주차장까지 엉망이 되어 있었고, 땅이 아닌 하늘 높이에서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터져나온 마력의 파동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그들을 치료하러 뛰어다니는 사람들, 망가진 배리어를 고치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 등등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5년 전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아엘로트는 겨우 억눌렀다. 지금은 과거에 대한 후회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이들을 도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야 했다.

"이실리아씨!"

그 와중에서 보라색 포니테일을 알아본 슈발만은 오토바이에서 뛰어 내려 이실리아에게로 뛰어 갔다.

"...슈발만씨?"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실리아가 슈발만을 발견하고 반색을 한다. 그 동안 아무 것도 못 하고 구호 물품을 옮기는 잡일을 하고 있던 이실리아는 갑작스레 막사를 덮친 파동 때문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막사에서 빠져나와 방황하던 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무사하댄다. 다행이다. 슈발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피해!!!"

주위 상황이 심상치 않다. 사람들이 고함을 치며 이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뭐지? 슈발만은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이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고 -

"루코씨, 피해요!"

역시 위험하다는 생각에 아엘로트는 급한 대로 루코라도 끌어안고 땅바닥으로 다이브했다. 그러자마자.

'쾅'

두 번째 폭탄이 지면에서 터져 버렸다.




"..푸압!"

호흡을 오래 참았다가 수면 위로 고개를 쳐 드는 사람마냥 루코가 옆으로 고개를 뺐다. 무언가 강력한 힘이 덮쳐오길래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땅에 엎어져 있었는데, 이제서야 압박하던 그 무언가가 가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 뭐하는 거야?!?!"

자기 위에 다른 사람이 엎어져 있었다. 화들짝 놀라 치한이야! 라는 식으로 아엘로트를 옆으로 밀쳐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물론 응큼한 생각으로 덮친 건 당연히 아닌 걸 알았지만 괜히 민망해져서 아엘로트를 한껏 째려보는 루코. 그런 루코에게 아엘로트는 난처한 듯 하하하 웃고는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큿 - "
"뭐야, 왜 그래?"

아엘로트가 일어나려다 말고 팍 주저앉길래 속이 덜컥하고 뒤집힌 루코는, 그제서야 아엘로트의 왼발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 왜 그래? 잠깐, 가만히 있어 봐,"
"아뇨, 괜찮 - "
"괜찮긴 뭐가 괜찮아?!!"

루코가 젖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서 아엘로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더 말하면 앞에 있는 아가씨가 울어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다. 씩씩대며 아엘로트의 발목을 살펴보는 루코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살면서여자 울리는 일은 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루코가 발목의 이곳저곳을 누르는 데서 생기는 통증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아엘로트는 묵묵히 견뎠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늘로부터 벌받고 있는 거라고 치자면서.
아차, 그러고보니 슈발만씨는?

"움직이지 마!"

아엘로트가 아파트 단지 안쪽을 보려고 몸을 틀자 루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말이지 도움이 안 돼, 라며 얼굴 들고 아엘로트를 보려는데 이 남자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있다. 무슨 일이지, 불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루코도 아엘로트가 보는 방향을 바라봤다.

"...!!!!!!!!"

이실리아가, 자신의 앞에 쓰려져 있는 슈발만을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슈발만씨? 슈발만씨!"

자신 대신 마력의 폭발을 받아냈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자기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로 이실리아는 그저 슈발만의 이름만 애타게 부르며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은 돌보지 않고 나같은 걸 지켜준 건가요, 어째서 신은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을 데려 간 건가요, 어째서 - 

"어째서!!!"


그 외침이 자신의 능력을 트리거시킨 것을 이실리아가 알아차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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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오랜만에 써서 큰일났어요. 저조차도 전편까지의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했어요 ㅠㅠ
연재 속도가 이 모양이라 죄송합니다ㅠㅠ 벌써 1년이 넘었다니!
이제는 이 사람들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 그런데 오토바이는 브레이크...밟는 거 맞나요? 저도 운전 면허가 없어요. 루코야 같이 따자.

* 네 맞아요. 사실 발만이실보단 루코아엘이 좋아서 끝부분이 미묘하고 소마루코보단 아엘루코가 좋아서 아엘이 부상당한 게 들어갔어요<<<<
원래 소마루코로 보이던 그 라인이 세월이 지나니 아엘루코로...그런데 게임 본편에서도 좀 그런 식이지 않던가요?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음음. ........잡담입니다.

* 타공카에 올리던 소설인데 다시 오랜만에 올리기 참 민망하네요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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