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주말. 그 날에는 모두 다 함께 시내로 놀러 나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모두 다라고 하면 우리 동아리 멤버인 나와 크로모도, 아엘로트와 중학생 시절부터 우리 동아리와 계속 놀러다닌 루코, 이렇게 넷.
남자 셋에 남자들에 비해 몇 배는 어려보이는 여고생 한 명의 조합이 남들이 보기에는 희한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나라면 가끔씩, 리안이 살아있었다면 다섯이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날도 평소의 무리 그대로 놀러나갔던 것 같다. 시내 중심의 영화관을 스타트 포인트로 해서, (루코의 계획에 따르면) 식당가와 오락실, 공원 등을 차례로 들른다는 듯 했다. 남자들을 못 믿겠다며 놀러나가는 계획은 항상 루코가 앞장서서 세웠고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표 예매도 따라서 루코 담당.
"오늘 고른 건 이건데.... 볼 게 별로 없더라고."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한 루코가 건넨 영화표 티켓에는, 어디 도서관 깊숙한 곳에 쳐박혀있을 법한 구식 연애 소설 제목 비슷한 것이 쓰여 있었다.
"...이 영화는 뭐지?"
크로모도도 보기 드물게 난색을 표한 채 루코에게 티켓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게 볼 게 별로 없다고 했잖아."
루코가 볼을 부풀리고 툴툴댔다.
"재미있는 영화는 벌써 저번 주에 다 상영 종료되어버려서, 남은 건 이런 영화들밖에 없더라고. 그러게 저번 주로 약속잡았으면 좀 더 재미있었을 거 아냐."
큭. 그거 나 때문에 미룬 건데. 다행히도 루코를 달래는데 나 대신 나서준 사람이 있었다.
"하하, 저번 주에는 슈발만 선배님께서 일이 있으셨으니까요."
학번상 4년 아래 후배인 아엘로트다.
"게다가 제목만으로는 영화가 재미있을지 없을지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또 모르죠, 루코씨가 좋은 걸 골라오셨을지도."
"...말은 잘 해요."
루코는 여전히 불만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아엘로트는 루코 전문 보모다. 보모라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 표현력이 부족해서인지 저 단어보다 녀석에게 어울리는 말을 찾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아엘로트는 정말로 루코를 돌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안이 죽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루코는 하나밖에 없는 언니를 잃은 충격으로 굉장한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어떤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아엘로트는 그런 루코를 매일같이 찾아갔다. 원래 우리 동아리의 부원이었던 리안과 함께 곧잘 부실로 혹은 동아리 행사로 놀러오곤 했던 루코는 동아리원들과 친했고, 그 중 아엘로트와는 특히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놀고 있다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엘로트와 각별한 사이라든지, 그런 건 아니었다. 게다가 아엘로트는 원래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고 대외적으로 사교적인 타입이라서 거의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성격이 까다로운 편인 루코와 비교적 잘 어울렸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례식 이후에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루코를 챙겨주는 아엘로트의 모습은 저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니었던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버렸던 패닉 상태의 루코는 아엘로트 덕분에 천천히 원래의 페이스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 동아리로 놀러오게 되었다. 가끔 리안의 흔적을 발견하고 침묵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곧 평소의 루코로 빠르게 돌아왔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들은 시내로 구닥다리 로맨스 영화를 보러 갔고... 결과는 참혹했다. 영화의 스토리는 백혈병에 걸린 전형적인 청순가련 여주인공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남주인공, 그리고 재벌 2세 남자 조연 세 사람의 지루한 삼각 관계를 다룬 것이었다. 주요 인물들의 출생의 비밀과 뜬금없이 터지는 사건 사고들이 지저분하게 얽히다가, 결국 끝에는 모두들 잘 됐네 잘 됐어 같은 행복하지 않은 해피 엔딩. TV에서나 볼 수 있는 막장 아침 드라마 수준의 영화였다. 스텝롤이 올라갈 때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영화가 시작할 때는 그래도 반 이상 채워져 있었던 좌석들이 많이 비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최악이었다."
"동감."
영화관을 빠져나오자마자 한 크로모도의 첫 마디에 루코가 동감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었어. 뭣보다, 저렇게 여자를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하는 남자가 요즘 세상에 어디있어?"
"하하하, 그런가요."
"그래! 자기 같으면 한 여자를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다 갖다 바치겠냐고. 말이 안 되잖아."
언제나 그렇듯이 루코 달래는 역에 자동 배정된 아엘로트가 루코 옆에서 조용히 웃는다.
"그러고보니 저런 영화를 꽤 열심히 보던데. 뭐야, 원래 저런 게 취향이야?"
"글쎄요...."
"그런 것 치고는 정말 열심히 보던데?"
아엘로트가 곤란한 웃음을 띄우고 고개만 젓는다. 그러고보니 저 녀석, 우리 사이에 끼어 자고 있던 크로모도와 딴청을 피우던 루코는 개의치 않고 스크린을 계속해서 '열심히' 보고 있었긴 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왜 말이 없냐고, 지금 찔려서 무음 모드로 들어가기라도 한 거냐고 아엘로트를 몇 번 추궁해 보던 루코는 곧 그만두고 영화관에 등을 돌렸다.
"뭐,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밥이라도 맛있는 걸로 먹어야지."
솔직히 말해서 그 이후로는 뭘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건은 모든 일정이 끝난 후에 터졌기 때문이다.
아엘로트가 왜 그렇게 평소답지 않게 하는 말이 짧았는지, 재미없는 영화를 진지하게 봤는지도 그 때 깨달았다.
저녁 식사까지 함께 하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여유롭게 방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취하는 공간은 이따금 정리해주지 않으면 금방 어질러져 멀쩡히 있던 물건도 못 찾게 되기 십상이니까. 그래서 윗옷을 벗어 책상 의자에 가볍게 걸치고 방 정리 좀 해 보려는데,
'따르릉'
휴대 전화가 울렸다. 집에선 괜찮지만 밖에서 울리면 다소 민망한 휴대 전화의 기본 벨소리. 화면에 찍힌 글자를 보니 아엘로트가 집에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왠일이지?
"어, 아엘로트 - "
"슈발만 씨!!"
그런데 귀에 들려오는 것은 아엘로트가 아니라 루코의 목소리였다.
"루코?"
"슈발만 씨, 도와 줘...."
게다가 울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도와 줘, 제발... 도와 줘.... "
계속 도와 줘만 연발하는 루코. 패닉에 빠져있던 루코에게 일단 알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는 막 벗었던 윗옷을 다시 걸쳤다. 글자가 아엘로트의 집전화로 찍혀있었으니 루코는 아엘로트의 집에서 전화를 걸었던 거겠거니 해서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아엘로트가 사는 곳이 그렇게 멀지는 않아서 어떻게든 달려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문 앞에서부터 루코의 울음소리가 들리길래 저도 모르게 남의 집 문을 허락도 없이 당겨 열었다. 그리고 그 때 나도 잠시 동안 패닉에 빠져버렸다.
친한 후배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옆에서 루코가 울고 있었기에 그나마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일단 집에 뛰어들어가기는 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바닥에 있던 녀석을 침대 위로 옮겨놓았던 걸 떠올려보면. 하기사 그 상황에서 뭐 맥박을 확인한다느니 호흡을 확인한다느니 하는 이성적인 행동은 크로모도나 가능했을 법한 일이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녀석을 옮길 때 몸에 잔뜩 열이 있던 것으로 아엘로트가 살아있었다는 건 확인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엘로트를 제대로 눕히고 나서 루코를 돌아보았다. 루코는 눈물범벅이 된 채로 여전히 울고 있느라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 했다. 그렇게 우는 모습은 리안 장례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열이 심하길래 아무래도 몸살 감기나 그런건가, 하고 멋대로 판단을 한 나는 일단 빨랫대에 걸려 있던 수건 하나를 물에 적셔서 얼음주머니 대용으로 아엘로트 이마 위에 올려놓는 것부터 했다. 그 전에 땀에 젖어있을 옷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여자아이인 루코도 있고 해서 옷 갈아입히기는 포기.
내가 조치를 취한 이후로 잠잠해진 루코는 이제 아엘로트의 침대 옆에 두 무릎을 모은 채로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얼굴을 닦지도 않았는지 여전히 눈물 범벅에 눈도 부어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루코는 아무 말도 없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눈도 깜박이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초점없는 눈으로 멍하니 방바닥만 내려다 보는 루코의 모습이 보통의 루코와는 딴판이라 낯설면서도 동시에 낯이 익어서 묘한 기분이던 나는, 아엘로트가 겨우 깨어날 쯤 되어서야 그 모습을 언제 봤었는지 기억해 냈다.
리안이 죽은 직후, 였지.
"...큭......."
"아엘로트?"
아엘로트의 신음소리를 들은 건지 내가 이름을 부르는 것에 반응한 건지, 루코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아엘로트는 그건 못 알아차린채 반쯤 뜬 눈으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그리고 보통은 이 말에 괜찮다 안 괜찮다 대답을 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루코 씨는..."
"..뭐라고?"
이 녀석, 깨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을 찾는다.
"루코씨...괜찮으신가요...?"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아엘로트의 말에 당황해 뭐라고 제대로 말이 안 나오려던 차에, 다행히도 루코가 대신 대답했다. 아니, 대답은 아니었나.
"..바보야......."
"......."
그제서야 반대편에 루코가 있다는 걸 깨달은 아엘로트가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다. 루코는 다시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이 바보... 왜 자기 생각은 안 하는데..!!! 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소리지르며 아예 아엘로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드려던 루코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곧 그 위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가지마..... 나만 두고 가지 말란 말야........"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흐느끼는 루코를 조용히 보던 아엘로트가 천천히 오른손을 올려 루코의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때 뇌리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엘로트는 루코를 위해 자신을 던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물론 그 때 상황만 놓고 봐서는 정말 뜬금없이 든 생각이었다. 그저 아엘로트가 루코를 보듬어 주는 것만 보고 떠오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3년 쯤 후인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렇게 짐작한 것이 틀린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아엘로트는 분명 리안이 죽은 후부터 계속 루코를 위해 자신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끼익'
"어, 루코."
위에서 문소리가 나길래 올려다보니 루코가 있다.
3년 전과는 다르게 녹색 머리를 자신의 언니만큼이나 기른, 활기가 사라진 무표정의 루코. 대학 초년생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어두운 모습이다.
"역시 밥, 먹어야겠지?"
"됐어. 전자렌지 자꾸 소리 나. 빨리 꺼."
아차, 그러고보니 옛날 생각 하느라 전자렌지에 음식이 있던 것을 잊고 있었다. 때마침 땡땡, 하고 전자렌지에서 빨리 음식을 꺼내가라는 알림음이 한 차례 울린다. 그 소리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루코가 다시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밥 굶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니 별로 놀랄 건 아니었지만, 아엘로트에 관한 에피소드를 회상하고 있었을 때 그런 루코를 보게 되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아엘로트가 살아있었다면 루코가 밥을 굶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루코가 저렇게 자기 자신에 관해 무심한 사람으로 변해버리지도 않았겠지.
"......."
내가 아엘로트의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후배가 그 동안 루코를 극진히 보살펴 왔던 것이 마음에 걸려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 의지로, 아엘로트를 위해 루코를 챙겨주고 있는 것인데도 가끔씩은 화가 난다. 그 녀석의 희생은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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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연재한답시고 예고편 올리고 잠적한 모 설정의 에피소드 하나. 으앙 쓰다가 새벽 4시 찍을 뻔 했네요 얼른 자야지... 나 발표 있는데... 교수님 면담 있는데...
1.
캔을 버리러 간 소마는, 쓰레기통에 가득 차 있는 캔들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형광등 불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저 캔들은 또다시 야근을 한 사람들이 먹고 버린 에너지 드링크 캔들. 더 슬픈 것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것도 똑같은 종류라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사무실을 쭉 둘러봤다. 분명 모두들 제자리에 있을텐데도, 파티션 위로 보이는 머리는 몇 없다. 분명 다들 어제부터의 야근에 지쳐 잠시 쪽잠을 자고 있는 거겠지. 그 와중에 고개 꼿꼿이 들고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문서를 뒤적이거나 하는 크로모도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크로모도의 반대편 쪽에서 의자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느릿하게 일어서면서 쭉 기지개를 펴는 건 아엘로트였다. 신기하게도, 이 시각까지 버티고 앉아 일하는 사람들은 체력적으로는 별로 강인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덩치가 제법 있어서 튼튼할 것만 같은 슈발만 같은 사람들은 이미 뻗은지 오래. 야근은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이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소마씨, 아직 살아계셨 - 하암... ...죄송합니다,"
역시 에너지 드링크의 힘을 빌었던 것인지, 아엘로트가 소마처럼 캔을 버리러 왔다가 인사를 건넨다. 그마저도 하품에 묻혀버렸지만.
"아엘로트씨, 그거 몇 캔 째예요?"
"...글쎄요, 세 캔..? 아니, 두 캔째인가? ...밤을 새면 기억하는 일이 어려워져서...."
두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겨우 답하는 아엘로트를 보고 소마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야근을 하다보면, 이렇게 사람의 의외의 면을 발견할 수가 있다. 가령 방금 전처럼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보이는 아엘로트라든가. 그런 점이 재미있다. 야근이란 건.
2.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니까.
계산대에 삐딱하게 기대 선 루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돼.
계산대로부터 조금 떨어진 사각 테이블에 두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 명은 긴 흑발이 아름다운 자신의 우아하고도 고상한 언니 리안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우월함에는 반도 못 미칠 잉여인력 A 모씨였다.
뭐, 객관적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보자면 말이다. 아엘로트라는 이름의 저 녀석도 사실은 그렇게 못난 인물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오히려 그 반대다. 핑코의 말에 따르면 외모 최상급, 성적으로 매길 수 있다면 에이 플러스라고 했나. 거기에다 아젤리나가 덧붙이길, 매너도 좋으시댔나. 그래, 매너가 좋지, 너무 좋아서 사람 대하는 얼굴에 항상 미소가 끊이지 않는 게 보다보면 질릴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저 녀석이 우리 언니와 어울릴 것 같냐...! 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다. 그러고 싶은데.
언니와 저 녀석은 분명 오늘 처음 대면한 사이다. 아엘로트가 뜬금없이 '루코씨네 가게 차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라며 나타난 덕에 가게 주인 리안이 그를 맞았고, 거기에서 어떻게 전개된 게 이 모양이다. 첫만남에서부터 서로의 관심사가 맞았는지 두 사람이 공통된 화제를 갖고 있었는지 그거야 루코가 알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리안이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겠다고 아예 자리 하나를 딱 잡고 앉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때부터 두 시간은 흐른 것만 같은데 아엘로트는 물론이고 리안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두 시간 동안 들어오고 나가는 손님들이 다들 한 번 씩은 둘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곁눈질한 것 같았다. 백 번 양보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면, 저 둘은 소위 '선남선녀'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저 녀석이 우리 언니와 어울릴 것 같냐는 말이다. 리안은 저런 잉여가 따라잡기에는 너무도 먼 경지의 우아함의 소유자다. 레벨이 다르다. 급이 다르다고. 찻잎 사 간다는 것을 핑계로 가게에 들어와서 언니에게 작업을 걸 생각이었다면 포기하는 게 좋아.
여하튼 절 3시에 자게 한 R님 책임져요 ㅋㅋㅋㅋㅋㅋ는 장난이고. 맘대로 썰 갖다 써서 죄송합니다 근데 연성은 좀 하려고 노력해야겠고 해서 큐ㅠㅠㅠㅠㅠㅠㅠ 살..살려주세요 :3.............
'쾅쾅'
"네,"
늦은 시각에 요란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면서, 아엘로트는 방문을 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쾅쾅쾅'
문까지 걸어가는 와중에도 아엘로트의 대답을 못 들었던 건지 상대가 연이어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일까, 짧게 한숨을 쉬고 아엘로트가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루코씨..?"
"......."
의외의 인물이다. 옆 방에 숙박하는 괴상한 사람이겠거니 지레짐작을 했었는데, 평소 요란법석을 피우기는커녕 그런 것은 싫어하는 축에 속하는 루코라. 게다가,
"나쁜 녀석!!!"
하고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기습 스크림 공격에 잠시 멍해진 아엘로트는, 일단 지금이 밤이니 자기 앞의 소녀를 조용히 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냈다.
"일단 진정하세요, 루코씨 - "
"바 - 보! 똥개!! 해삼!!! 말미잘!!!!"
이번엔 기습...비속어 공격인가. 순간 머릿속에서 열이 뻗치려다 말았다. 지금 보니 이 아가씨, 얼굴이 빨갛게 된 채 왠지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듯 눈이 게슴추레한 상태다.
그제서야 기억해 냈다. 오늘은 다소 힘든 싸움이 있었다. 그래서 전투를 겨우 이기는 쪽으로 끝내 놓은 후, 펠리언이 '오늘 밤에는 축배를 들자'느니 '나 힘들다 오랜만에 술먹고 싶다' 등등 이런저런 이유를 대더니만 기어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부대 보급마차에서 술병을 꺼내들었었다. 부대원들은 물론이고 원정대원들도 대부분 성인이었으니 술자리를 벌이는 것이 아주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 미성년자인 핑코와 소마, 루코는 술로부터 떨어뜨려 놓아야 했을 것을, 펠리언 이 작자가 그 쪽에는 부주의했던 모양이다.
아엘로트는 보통 때보다 마나를 많이 소진한 나머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피로가 몰려와서 여관 방으로 빨리 돌아왔던 것인데 - 그래도 예의상 다함께 하는 건배 정도는 해 주고 왔지만 - 이렇게 되어서야 빨리 쉴 수가 없겠다. 씻자마자 잘 걸, 괜히 짐 정리한다고 시간을 보내느라 지금에서야 침대에 들어갔던 건데 루코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끌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긴 루코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 상황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머저리!!!!! 거머리!!!!!!! 그...그리고 에...또 뭐....뭐야, 에라이 나쁜 놈아!!!"
그리고 루코는 아직도 이러고 있다.
"...루코씨, 진정하시구요. 이제 그만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정해-? 뭘?? 뭐-얼?!!!!!"
말이 안 통할 듯 하다. 아무래도 무력을 써서 루코를 방으로 데려다줘야 할 것 같다. 아엘로트는 어쩔 수 없지, 하고 한숨을 푹 쉬고 루코의 어깨를 잡았다.
"자자,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몇 호셨죠?"
"이거 안 놔?!!!!!!!!"
루코가 잡힌 어깨를 세게 흔들어 아엘로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네, 루코씨, 몇 호셨죠? 저긴가요?"
"이 바보야, 이거 놔!!! 놓으라고!!!!!"
아무리 흔들어봐도 아엘로트의 손 힘을 당해낼 수 없자, 루코는 이제 팔을 위아래로 휘젓기 시작했다.
"저리 가!!!! 변태!!!!!! 놓으란 말야아아!!!!!!! 이 바보야 -"
어깨를 잡힌 채 버둥대던 루코가, 갑자기 아엘로트 쪽으로 넘어져 버렸다. 반사적으로 바닥에 엎어질 뻔한 루코를 붙잡은 아엘로트는,
"......."
루코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 것을, 좀 더 정확하게는 잠이 들어 버린 것을 확인했다.
"......."
허무함이 갑자기 조용해진 복도를 채우는 것 같았다. 이런 피곤한 상황이 왜 하필 자신에게 닥쳐온 것일까. 아엘로트는 지금 당장 침대에 엎어지면 그대로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먼저 루코를 어떻게 해야 했다. 아무래도 아래층 식당에 내려가 아직 술을 즐기고 있을 사람들에게 루코의 방을 수소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루코씨..?"
자는 게 아니었나, 하고 아엘로트가 다시금 자신에게 붙잡힌 루코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게 자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는데, 입이 조그맣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마지막 말과 함께 길게 숨을 내뱉은 루코는, 그 후로는 '쌔근쌔근 잠들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궁금해졌지만, 바로 억눌렀다. 루코의 개인적인 일이다. 그것도 술김에 나온 소리다. 자신은 못 들은 것으로 하는 거다.
읏샤, 하고 아엘로트가 잠에 빠진 루코를 안아들었다. 아래층에 가서 호수를 물어볼 동안 루코를 그대로 복도 바닥에 놔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루코는 침대에 옮겨놓고 내려가야겠다.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귀여운 아가씨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은 정말 바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침대 위의 루코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귀엽다는 수식어는 아까 한 모금 마신 알코올 때문에 잘못 생각한 거다, 라는 건 자기 합리화 얼른 덧붙이기.